2001년 국내 재계는 어느해 못지않게 다사다난(多事多難)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회생을 주도했던 반도체는 D램 가격의 폭락으로 사상 최악의 한해를 보냈다. 우리 경제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부실기업들의 처리 또한 얽힌 실타래마냥 해법찾기가 어려워 정부와 채권은행들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각종 규제완화, 주5일 근무제, 집단소송제 등을 놓고 재계와 정부 노동계는 첨예한 대립을 지속했다. 연초부터 시작된 주요 사업장의 파업은 연말까지 이어져 노사분규의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 반도체 '악몽의 1년' =지난해 3.4분기부터 공급과잉의 조짐을 드러낸 메모리반도체 사업은 미국에서 시작된 정보기술(IT)산업 경기 불황의 여파로 바닥까지 가는 힘든 한 해를 보냈다. 특히 1백28메가 SD램 가격은 한때 1달러 이하로 폭락, 국내 메모리반도체 업계는 생산을 하면 할수록 적자폭이 늘어나는 구조적 악순환에 빠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하이닉스반도체는 파산위기로까지 내몰리는 극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메모리반도체업계 부동의 1위 삼성전자도 지난 3.4분기에 사상 처음으로 반도체 사업부문이 적자를 기록하는 등 불황을 피해가지 못했다. ◇ 주5일 근무제, 출자총액제한제도, 집단소송제 등을 둘러싼 논란 =주5일 근무제 시행을 놓고 경영계와 노동계가 1년 내내 첨예하게 맞서며 완전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정부는 지난 19일 단독 입법안을 확정, 강행 의지를 내비쳤다. 각종 규제완화를 둘러싼 정부와 재계의 대립도 눈에 띄게 드러났다. 재계는 올 한햇동안 '30대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제도'와 출자규제 등 각종 기업규제의 폐지 및 완화를 줄기차게 건의했다. 그 결과 최근 정기국회에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개정돼 기업활동에 약간은 숨통이 트이게 됐다.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도입을 둘러싸고도 재계와 정부는 줄다리기를 했다. 재계는 소송남발 가능성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집단소송제 도입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정부는 시안까지 만들어 국회에 상정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 잇단 파업 =연초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시작된 노조의 파업행렬은 연말까지 각종 사업장으로 이어졌다. 대우차 부평공장 노조는 정리해고를 단행하려는 회사측에 맞서 공권력이 동원될 정도의 격렬한 파업을 벌였다. 여름에는 화섬업계가 잇단 파업으로 몸살을 앓았다. 코오롱과 효성은 울산공장 파업으로 곤욕을 치렀다. 83일간 파업이 지속된 태광산업과 대한화섬에서는 근로자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극심한 파업 후유증으로 태광산업은 창사 40년 만에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한화와 대림은 여천NCC에서 촉발된 파업의 원인과 해결과정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한항공은 조종사 노조의 파업으로 4백억원 가량의 매출 손실을 봤다. 아시아나항공 역시 1주일 가량 계속된 승무원 노조의 파업으로 1백억원이 넘는 손실을 기록했다. 연말에는 협력업체들의 파업으로 대우차 전 공장이 일시적으로 가동 중단에 들어갔다. 현대자동차도 성과급 배분과 해고자 복직을 둘러싸고 노조가 부분 파업을 벌였다. ◇ 구조조정 칼바람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재계는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못지않은 매서운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지난해 전체 계열사가 흑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고강도 구조조정을 선언한 삼성은 하반기에 계열사별로 사업분사와 희망퇴직 등을 통해 10% 가량의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9.11 테러'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항공업계는 대규모 인원감축과 조직 통폐합, 자산 매각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세계적인 공급과잉과 중국의 추격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화섬업계에서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근로자의 10% 가량(2천7백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생명보험 업계는 저금리로 인한 역마진(자산운용수익률이 지급이자율을 밑돌아 보험사가 손실을 보는 현상) 문제에 시달리면서 인원감축과 지점축소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1위 업체인 삼성생명은 본사 인력 8천명 가운데 1천50명을 감축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며 대한생명은 생활설계사 2천5백명을 줄인데 이어 최근 1천명 추가감원에 나섰다. ◇ CEO 부침 =재계의 최고경영자(CEO)들에게도 올해는 시련의 한 해였다. 한때 각광을 받았던 벤처기업들은 거품이 꺼지면서 추락했고 재계와 금융계의 경영자들은 불황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드러진 경영 실적을 자랑하면서 스타로 떠오른 CEO가 있는 반면 명성에 오점을 남기고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 CEO도 적지 않았다. 재계에서 올 한 해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한 CEO로는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이 꼽히고 있다. 정 회장은 현대.기아차의 올해 순익이 1조원이 넘는 사상 최대의 경영실적을 일궈냈다. (주)두산의 박용만 사장은 두산보다 외형이 큰 한국중공업을 인수, 그룹 컬러를 '주류업체'에서 '자본재 생산업체'로 탈바꿈시킨 주역으로 평가받았다. 휴대전화기 '애니콜'을 세계 '빅4'에 올려놓은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이기태 사장도 주목을 끌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별세는 재계의 가장 큰 뉴스로 기록됐다. 정 명예회장의 가신이던 현대아산 김윤규 사장은 지난 봄 현대건설의 유동성(자금)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은 전문경영인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옷을 벗었다. 벤처업계에서는 벤처업계 '대부'격인 메디슨 이민화 회장(47)을 비롯 닷컴 3인방으로 꼽히던 한글과컴퓨터의 전하진 사장, 새롬기술의 오상수 사장 등이 줄줄이 경영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