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정책판단과 사법적 斷罪 .. 姜萬洙 <디지털경제硏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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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감사원은 1997년부터 지난 3월 말까지 투입된 1백40조원의 공적자금 운영실태를 감사한 결과,정부의 판단 잘못으로 12조원 정도 과다집행됐고,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에서 대출 받은 부실기업의 대주주나 임원 5천여명이 7조원 정도의 재산을 은닉하거나 빼돌렸고,이에 따라 금융기관과 부실기업 관계자 67명을 고발하거나 징계를 요구했다.
이어서 재경부를 중심으로 관계부처협의회가 구성되고 합동조사단이 설치돼 금융기관 임직원과 부실기업주들이 숨겨놓은 재산의 환수에 나서는가 하면,검찰은 '공적자금비리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공적자금에 관련된 기업주 수사와 함께 공무원의 비리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이번 감사에서 "추가조성 계획이 없다"고 장담하는 등 정책판단착오와 관리소홀 문제가 지적됐는데도 공무원은 한명도 처벌받지 않은 것에 대한 논란이 일자 감사원은 "IMF사태 직후인 97∼98년만 해도 상황이 굉장히 긴박해서 다소 법적 흠결은 있지만 그것 가지고 개인을 문책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IMF사태 직전'의 더 긴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정책판단 잘못'에 대한 '수사의뢰'와는 크게 달라졌다.
1997년 '환란' 당시 강경식 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위기상황의 심각성을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정책판단 잘못'을 이유로 감사원이 수사의뢰하고,검찰이 직무유기죄로 구속 기소해 각각 징역 4년과 3년을 구형했으나,법원은 '국민정서'를 업은 '정치적인 단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당시에도 '정책판단의 오류'-당사자들은 오류를 시인하지 않았고 법원도 오류로 판결하지 않아 '정책판단의 견해차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를 사법적 판단에 맡기는 게 적합한가에 대해 감사원 내부에서도 "고의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이상 정책판단을 나중에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적지 않았고,검찰 내부에서도 '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선택한 정책이 나중에 실패했다'는 사실만으로 직무유기혐의를 적용하는 게 무리라는 의견이 대두됐다고 한다.
정책선택의 실패를 '고의성'과 관계없이 처벌한다면 공무원들의 사기저하는 물론이고 책임행정 풍토까지 없어진다는 지적도 있었다.
'환란'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일 때 어떤 재경부 간부는 "나중에 문제될 소지가 있는 정책에는 가급적 끼어들지 않는다.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구조조정같이 민감한 사안은 가능하면 금융감독위원회에 맡겨버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났을 때 '환란주범'으로 몰려 갖은 수모와 고초를 겪었던 당시 재경부 직원들은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라며 "당시 강 부총리는 경제상황과 외환상황을 매일 보고 받고 토의를 거듭하며 대책을 지시했는데 직무를 유기했다고 볼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판단이 틀린 것에 대해 행정적인 책임은 몰라도 사법적인 책임까지 추궁한다면,감사원이나 검찰의 사전 승인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얘기다.이번 판결이 책임감을 갖고 소신 있게 업무를 수행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무죄로 풀려났을 때 "내가 무죄 되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X와 Y다.
내가 유죄판결을 받았으면 그 사람들 발뻗고 잠 못 자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유죄가 됐다면 이번 공적자금 감사에서 여러 고위공직자가 형사처벌 당하는 수모를 겪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환란재판'이라는 '정책판단의 사법적 단죄'가 진행 중일 때 국제금융계 인사들은 우려를 표명했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국민정서'에 가려진 '정치적 단죄'가 지나쳤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지난 9월 테러로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가 폭파되고 나서 공무원이 처벌됐다는 보도는 아직 없다.
'고의'나 '중대한 과실'에 의한 공직자의 잘못은 당연히 처벌돼야 한다.
그러나 '잔치하면 돼지 잡는 식'으로,일이 터지면 원인분석이나 사고의 수습보다 '국민정서'에 떠밀려 공무원부터 단죄하는 '한풀이'식의 문제해결방식은 없어져야 한다.
mskang36@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