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앞둔 금융가의 최대 이슈는 은행 합병이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지난달 모대학 특강에서 슬쩍 운을 뗀 뒤 '은행 추가합병 움직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하나+제일은행의 물밑협상이 사실로 확인됐고 위성복 조흥은행장도 서울은행 인수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전격적인 합병발표가 있은 지 꼭 1년만에 은행 합병 회오리가 금융가를 다시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은행들이 왜 이렇게 덩치를 키우기 위한 짝짓기에 몰두하고 있을까. 합병만이 과연 살 길인가. 합병설에 휘말린 해당 은행의 종업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번 품어 볼 만한 궁금증이다. 그 이유를 초대형 은행합병의 '원조'인 통합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에게 물어봤다. 김 행장은 "국민 주택은행의 합병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의 설명은 간단 명료했다. 한국 금융시장에 소위 '틈새시장(니치마켓)'이 없기 때문이란 것.그나마 과거엔 주택금융이 대표적인 틈새시장이었지만 모든 시중은행은 물론 신용금고까지 주택담보대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 마당에 주택금융은 더이상 틈새일 수 없다는 지적이다. 전통적으로 주택금융에 경쟁력을 지녔던 주택은행이 홀로서기를 포기하고 합병의 길을 택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김 행장은 말했다. 김 행장의 이같은 설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합 국민은행은 앞으로 대형은행으로서 모든 부문에서 다른 은행과 정면 승부를 걸겠다는 뜻이다. 특히 그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금융시장에 틈새시장이 없다면 다른 은행들의 선택 방향도 분명해 보인다. 금융당국과 금융계 일각에선 여전히 대형 은행과 함께 특정 분야에 강점을 지닌 이른바 부티크(틈새시장형 은행)가 공존하는 금융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정보산업인 금융업종의 특성상 규모의 경제를 통한 비용절감 효과나 대외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대형 은행의 등장은 필수적이지만 중소형 은행의 존재도 필요하다는 것. 일리 있는 주장이다. 문제는 부티크의 생존 가능성이다. 합병이냐 독자생존이냐를 놓고 저울질하는 여러 은행들의 고민도 여기서 출발한다. 대형 은행 후보는 이미 가시화돼 있다. 통합 국민은행과 한빛은행 중심의 우리금융그룹,신한은행을 축으로 한 신한금융지주회사 등이다. 이렇게 보면 다른 은행들은 이제 자신들의 거취결정을 더 미룰 수 없게 돼 있다. 니치 플레이어로 갈 것인지,아니면 대형화를 추구할 것인지 먼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추가 합병 움직임도 이같은 맥락에서 봐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행스러운 건 최근의 은행 합병움직임이 '정부주도'라는 종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우선 과거처럼 대등 합병이 될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하나+제일은행의 시나리오를 예로 들더라도 두 은행의 자산규모와 재무구조 등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볼 때 대등한 입장에서 합쳐지기 어렵다. 정부가 개입하는 이른바 타율 합병도 비현실적이다. 두 은행 모두 외국계 대주주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장원리에 입각한 자율합병방식이 될 공산이 크다. "이야기는 활발하게 오가는데 실제 진척은 안 되는 것 같다"는 고위 당국자의 발언에서도 이같은 추정은 가능하다. 통합 국민은행은 출범 한달 만에 벌써 국내 금융시장에 엄청난 임팩트를 가져오면서 다른 은행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추가 합병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은행들의 최고경영자(CEO)는 과연 한국 금융시장에서 한 두 분야에 특화된 니치 플레이어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여부부터 판단하는 일이 가장 급선무인지도 모른다. songj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