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부유층을 중심으로 '미국에서 애를 낳아 시민권을 얻는'패키지 여행상품이 유행한다고 한다. 얘기인즉 이러하다. 강남지역 임신부들이 분만 예정 6개월 전에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미국에서 숨어 지내다 아이를 낳는다. 미국의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그 아이는 미국시민권을 얻는다. 몸을 추스른 산모와 아이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부모들의 TV 인터뷰 태도였다. 그들은 불법체류자가 되면서까지 자녀를 위해 '희생'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미국시민권이 생기면 우리나라에서 군대 안가도 되고 또 외국인학교에도 보낼 수 있어요. 영어는 그냥 배우게 되는 거잖아요" "유학을 보내면 시민권자니까 학비가 싸고,등록금 대출도 받을 수 있어요"등등.모 국립대학의 교수만 아내가 애 낳을 때쯤 우연히 미국에 있었을 뿐이라며 말을 더듬거렸다. 이들이 말하는 톤에서 자신들이 우리나라의 국방의무나 미국의 납세의무는 이행하지 않고,양쪽의 권리만 찾으려 한다는 죄의식은 찾기 힘들었다. 오히려 문제가 많은 군대제도나 교육제도를 '혼자 힘'으로 슬기롭게(?) 헤쳐나간다는 긍지가 언뜻언뜻 엿보였다. 며칠 후 몇몇 학부모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우연히 같은 화제가 등장했고,그들의 이해 어린 반응에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자녀를 조기유학 보내는 것이나,출생 때 미국시민권을 얻어주는 것이나 둘 다 교육문제를 해결하려는 동일선상의 발버둥이라고 했다. 오히려 자녀에게 미국시민권을 얻어주면,(외국인 학교에 가니까)조기유학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외국대학에 유학갈 때는 학비가 덜 든다는 것이다. 자녀교육 때문에 이산가족이 될 필요가 없고 노후대비금도 날리지 않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냐는 뜻으로 들렸다. 이것이 우리교육의 현주소다. 우리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교육제도에 불만을 갖고 있을 때 이를 사적(私的)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학교의 교육 과정에도 없는 논술·면접을 대학입시 종목으로 넣었다면,은행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과외를 시킨다. 경시대회에서 입상한 특기자를 우대한다니까 경시학원으로 달려간다. 외국처럼 재능있는 사람을 키우는 교육제도도 없으면서,경시대회 입상자를 입학우대한다는 것이 웬말이냐고 항의하는 학부모의 조직적인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휘둘리다 지치면 돈 있는 사람은 자녀를 외국유학시킨다. 더 준비성 강한 사람은 태어나는 자녀에게 미국시민권을 마련해주어 외국인학교와 외국대학에 보낼 준비를 해둔다. 많은 학부모들은 지금 대가가 가장 적고 효율성이 높은 공적(公的) 해결책을 포기하고 있다. 그저 무기력하게 제도의 역작용에 시달리거나,돈 권력 혹은 탈법적인 수단을 통해 사적 해결책을 찾고 있다. 사적 해결책은 비효율적이다. 많은 경우 비싼 대가를 치른다. 조기유학으로 별 수확도 없이 탈선한 자녀들,어머니가 자녀유학에 동행하면 혼자 남아 고통받는 가장들,비싼 유학비용으로 인해 사라진 노후대비자금,자녀가 유학에서 돌아와 고국의 직장에서 겪는 재적응의 어려움 등은 제한적인 예에 불과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사적 해결책은 많은 경우에 탈법적이다.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그런 사적 해결책을 쓰기도 어렵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적 해결책은 문제를 치유하지 못한다. 우리들이 공적 참여와 공적 해결책을 기피하는 행태는 비민주적 권위주의 사회의 유산이다. 그 당시는 국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었다. 그저 위에서 정해주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싫으면 사적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다. 이제 학부모들은 목소리를 높여 학교 안이나 바깥의 학부모운동에 참여해야 할 때다. 교육제도의 이해당사자인 학부모만이 교육문제를 정확히 알며,해결책을 왜곡하지 않을 집단이기 때문이다. 공적 해결을 위한 '정면도전'은 힘든 길이지만 '유일한 길'이다. 그 길을 피할 수 없다면 용감하게 걷기 시작해야 한다. lmn@snu.ac.kr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