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경 < KTF 사장 ykl1943@magicn.com > 아마 누구나 어렸을 때 한번쯤은 죽기까지 의리를 지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죄를 짓고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기 위해 언제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그 대신 죽겠다는 친구의 보증을 담보로 며칠간의 휴가를 얻는다. 어머니를 장사지내러 간 죄인은 약속시간이 다가오는 데도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친구가 대신 사형을 받으려는 찰나 멀리서 죄수 친구가 달려온다. 그냥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돌아온 친구.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의리있는 사나이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히트한 영화 '친구'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의리를 무작정 미화하지 않는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친구를 위한다며 폭력을 행사하고 배신에 대해 무차별 응징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묘사했다. 전직 대통령의 비서가 법정에서 끝까지 증언을 거부한 것도 의리의 상징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말 바꾸기가 난무하는 세태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의리가 법에 우선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제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도 친구들간에 신의를 지키며 사는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허에 꿈을 두고 벤처를 창업한 친구가 부도 위기에 직면하자 자신의 전세금을 빌려주어 친구의 재기를 가능케 하고 장애인 친구의 불편한 발을 대신해 평생동안 친구의 발이 돼 주기도 했다. 의리가 범법의 동기로 무조건 용인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키는 것보다는 목숨을 걸고 법을 지키는 것을 미화해야 한다. 전통적 가치관인 삼강오륜을 보면 준법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 반면 '붕우유신'이라 하여 친구간의 신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군신유의'가 의미하는 왕에 대한 충성이 실제로는 법에 대한 승복을 의미함을 감안할 때 이것이 친구간의 신의보다 더 우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리를 지키는 것은 한 사람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이지만 법을 지키는 것은 사회의 모든 사람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