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閑談] (12) '고송스님(파계사 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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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만 찾아다니지 말고 실제를 알아야 돼.단신불무언(但信佛無言)이라,말없는 부처를 믿으란 말이야.그러면 연화종구발(蓮花從口發),입에서 연꽃이 따라 나와.말하는 부처를 믿다간 장애가 생겨 큰 일 날 거야"
온 산이 가을빛으로 물드는 팔공산 자락의 파계사 내원(內院).
이 절의 조실이며 한국 불교계의 최고령 원로인 고송 스님(古松·96)은 "서울에서 왔다"며 법문을 청하자 이렇게 일갈했다.
말없는 부처,즉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참말(깨달음)이 나오므로 남의 '말'에 매달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노장(老長)은 "참으로 도인은 저자에 있어.시장에 가면 도인이 꽉 찼어"라고 했다.
도인이 시장에 있다니….
값이 맞으면 물건을 사고 팔 뿐 그 밖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상인들에게서 걸림없는 여여(如如)함을 배우라는 뜻이다.
노장은 1920년 경북 영천의 속가(俗家)를 떠나 이곳 파계사로 출가했으니 법랍 80년이 넘었다.
백수(白壽)를 눈 앞에 둔 노장에게 인생이란 어떤 의미일까.
"사람 욕심은 한이 없어서 만년도 부족하지만 인생은 잠깐이야.눈 깜빡하면 지나가는 찰나간이요 호흡지간(呼吸之間)이지.이 몸은 촛불같은 거라,대궁이 타면 불이 꺼져.그러니 세월가면 늙고 버려야 할 몸뚱이보다는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마음을 궁구해야지"
노장은 "마음은 물과 같다(心如水)"고 했다.
물은 얼음이 되고 수증기가 되어도 젖는 본성을 잃지 않듯이 마음에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 자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 참선수행이다.
어떻게 공부를 하면 삶에 도움이 되겠느냐고 노장에게 물었다.
"공부를 하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벌써 방해가 되는 거라.자기의 본래면목을 찾는 것이 참선이야.화두를 들고 끊임없이 의심해 들어가면 얻는 게 있지.그러나 이걸 해서 뭘 얻겠다고 생각하면 장애가 생겨 깨달음은 그만큼 멀어져.참선은 아는 것을 다 버리고 모르는 데로 들어가는 공부야.사람들은 다 알려고,다 안다고 목에 힘을 주지만 참으로 모를 때 알아지는 것이야"
남의 이야기에 매달리지 말고 스스로 공부(수행)하라고 노장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어떻게 깨닫느냐가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노장은 "밖에서 자꾸 물을 갖다 부어도 금방 새버린단 말이야.그곳(자기)에서 물이 나오도록 해야지"라고 비유했다.
노장은 한국 불교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1930년부터 15년간 마하연,유점사,신계사 등 금강산 일대와 묘향산 보현사 등을 두루 거치며 수행한 것이나 일제 때 불교잡지를 만들던 만해 한용운 스님을 도왔던 일 등 지금은 전설같은 이야기가 노장의 삶이기 때문이다.
오대산 상원사에서는 한암 스님으로부터 전법게(傳法偈.법을 전하는 게송)를 받아 법맥을 이었다.
不讀金文不坐禪(부독금문불좌선·경도 읽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며)
無言相對是何宗(무언상대시하종·말없이 마주하니 이 무슨 종인가)
非風流處風流足(비풍류처풍류족·풍류 아닌 곳에 풍류가 넘치니)
碧峰千年秀古松(벽봉천년수고송·푸른 묏부리에 천년 고송이 빼어났네)
고송이라는 법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출가 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오래돼서 잊어버렸지" 하면서 기억을 더듬는다.
"열다섯살 때 무작정 절이 좋아서 부모님 몰래 파계사로 가출했지.이듬해 섣달 그믐날 부모님이 파계사로 찾아왔을 땐 이미 출가한 뒤였어.삭발하던 날,삭도가 잘 들지 않아 얼마나 아팠던지….그래도 꼼짝않고 있었더니 노장들이 '됐다'고 하는데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어"
그로부터 80년,노장은 보통 사람들의 일생보다 긴 시간을 수행자로 살아왔다.
파계사 주지를 잠시 맡았던 것 외에는 높은 자리에 나서 본 적도 없다.
요즘도 도량석이 시작되는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노장의 방에 불이 켜지고 하루 일과는 정진,운동,공양,산책 등 자로 잰듯 규칙적이다.
그래서 장수하는 것일까.
그러나 노장의 대답은 뜻밖이다.
"비결이 따로 없어.인욕하면 장수해.인욕을 못하고 진심(瞋心·성냄)을 내면 좋은 게 다 없어져버리거든.그러니 항상 참고 견뎌야지.남에게 이기려 말고 져야 돼.욕심 부려 이겨봐야 아무 이득도 없고 진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거든"
노장은 그래서 한 점 꾸밈이 없고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온화하다.
사람을 섣불리 평가하지도 않는다.
노장의 한 제자는 다른 사람을 흉봤다가 "이놈아,네 마음도 모르는 놈이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아느냐"는 호통만 들었을 정도다.
노장은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 했다.
좋은지 나쁜지는 내 마음이,양심이 알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노장이 다시 한번 당부한다.
"말없는 부처를 믿어야 해.입 한 번 잘못 놀리면 고(苦)가 생겨.천언만당불여일묵(千言萬當不如一默)이라,천번 말해서 만?옳더라도 한마디도 안한 것만 못하다는 말이야"
대구=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