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이후 세계질서가 어떻게 재정립될 것인가를 논의한 하버드대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만큼 세계의 주목을 받고 동시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저서도 많지 않다. 처음에는 같은 제목의 논문을 국제외교문제 전문 저널인 '포린 어페어즈'에 기고했다. 1940년 이후 가장 많은 토론을 이끌어낸 논문이었다는 저널편집자의 평에서 그의 주장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는가를 알 수 있다. '문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부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며','문명의 충돌은 세계적 규모로의 부족간 갈등이며','1천4백년이나 지속돼 온 이슬람과 기독교 간 갈등관계에 비하면 20세기 자유민주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갈등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며','아시아의 경제발전은 중국의 지배력을 증대시키게 될 것이며'등의 표현에서 저자가 피력하고자 하는 향후 국제질서의 정립방향을 파악할 수 있다. 세계화 추세에서는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지만,역사적으로는 '우리'와 '그들'로 구성되는 두개의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상존하는 미국은 이러한 문명의 충돌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미국·유럽·러시아·인도가 중국·일본·이슬람과 투쟁한다는 시나리오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프랑스의 경제사상가 기 소르망도 '열린 세계와 문명창조'라는 저서에서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세계화 추세와 부족주의 부활이라는 상호 모순된 현상의 공존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헌팅턴의 분석에 기본적으로 동조하지만,미래의 전망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고 있다. '세계화'된 엘리트와 '민족주의화'된 민중들,'세계화'된 경제생활과 '지역적'인 정치생활과의 모순은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기보다는 이러한 모순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핵심관건이라는 소르망의 주장은 매우 흥미롭다. 미국은 원래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국가가 아니라고 정의하고,'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미국의 노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지배력이 강해져서 미국화된 세계화가 부족주의의 문화적 다양성을 훼손하게 되면 반미운동을 촉발할 위험이 있으며,미국이 세계화에 대한 반동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소르망의 우려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세계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미 국방부에 대한 테러에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 있다. 테러집단과 테러목적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헌팅턴과 소르망의 예견을 현 사태에 연결짓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며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중동의 일부 국가에서 이번 테러에 환호하고 있다는 뉴스는 우리를 분노시키면서 동시에 위 주장들을 연상하게 만든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정부는 국제정치·경제의 안정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미국보다는 자유민주·시장경제체제에 대한 테러라고 규정짓고,한국이 회원국인 국제기구들이 미국경제의 안정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면서 주도적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국제금융시장·증시·수출·원자재수급 등 예측치 못한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방안 마련도 중요하겠으나,경제주체들의 안정적 경제행태를 유도하도록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만전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그마한 소요에도 사재기 등을 서슴지 않는 우리 경제주체들의 성숙하지 못한 경제행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검증된 자료도 없이 미래경제에 대한 불안감만을 증폭시키는 언론보도 등은 자제돼야 한다. 눈을 세계로 돌려 우리의 위치를 역사적으로 조명해 보고,우물안 개구리식의 내부지향적 낡은 이념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반성해 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아시아적 가치라고 말하는 이념은 실속이 없다"는 소르망의 말에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글로벌 추세를 이해하는 자세로 대처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우리 사회에는 국제사회에서와 같은 갈등현상이 심화되지는 않는지 돌이켜 볼 시점이다. chskim@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