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서(62) 데이콤 부회장은 매일 새벽 5시 교회예배로 아침을 연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아내 김에스더(59) 여사 손을 잡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회에 나간다. 목사안수를 받은 김 여사는 최근 서울 방배동 집 근처에 예수성결교회라는 개척교회를 세워 담임목사가 됐다. 박 부회장은 "5명의 성도로 시작한 교회가 지금은 30여명으로 늘어났다"며 흐뭇해 한다. 그러면서 데이콤 회생의 역할이 주어진 자신과, 힘든 개척교회를 시작한 아내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묘한 일"이라고 말한다. 박 부회장은 지난 2월 구본무 LG 회장으로부터 특명을 받고 데이콤 대표로 부임했다. "데이콤을 구할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구 회장의 신임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거웠다. 지난 96년 3월 통상산업부 차관 옷을 벗고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사장에 취임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한중은 파업 49일째를 맞고 있었다. 강성 노조의 깃발이 회사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차라리 교수직이나 알아볼 걸'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는 '타이거 박'이란 별명에 걸맞게 불도저식 추진력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파업의 불길을 잡아나갔다. 8천여 임직원이 혼연일체가 돼 경영혁신에 나서도록 고삐를 죄었다. 박 부회장은 "당시 터빈발전기 원가를 50% 가량 낮추고 취임 2년째에는 연간 32억달러어치의 해외수주를 따냈다"며 "재임 2년 동안 무쟁의를 기록한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경영자로서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른 경영인 박운서는 스스로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라 부른 데이콤호 선장으로 또 한번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 그가 데이콤의 '구원투수'를 수락한 것은 자신이 묶은 매듭을 풀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LG의 정보통신사업 전략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던 그는 반도체 빅딜과 데이콤 인수에 큰 역할을 했다. 지금 와서 나오는 말이지만 현대와의 반도체 빅딜은 성공했고 데이콤 인수는 실패작이었다. 그는 그룹내에서 "투 콤(Two Com:LG텔레콤과 데이콤) 때문에 죽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걸 듣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박 부회장은 취임 두 달째인 지난 4월 말 데이콤 구조조정안을 발표하고 강도높은 인력조정을 추진했다. 43명의 임원을 절반 이하인 21명으로 줄이는 등 임직원을 2천9백여명에서 2천명으로 감축했다. 또 임금을 총액기준 15∼20% 삭감하고 무쟁의를 결의하는 노사평화선언을 이끌어냈다. 강남사옥의 9개층을 임대함으로써 2백억원의 임대보증금을 현금으로 확보하는 등 허리띠를 졸라맸다. 이와 함께 쇠락하는 PC통신 천리안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전략적 파트너 물색에도 나섰다. 구조조정 이후 업사이징(Upsizing)할 수 있는 '대박'을 준비중이며 비효율적 조직문화에도 메스를 가하고 있다. 워낙 할 일이 많아서 그런지 그는 5년6개월간의 경영인 생활을 중간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아직 배우는 단계"라고 겸손해 한다. "예전에는 정부 주도의 경제시스템이었잖아요. 정부 정책만 잘 따라도 사업이 번창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정부가 주(主)고 민간이 종(從)이었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글로벌화, 자유화되면서 민간 CEO(최고경영자)의 역할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CEO가 돈도 꾸러 다녀야 하고 고용안정도 이뤄야 하며 세계적 기업들과도 경쟁해야 합니다.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거죠. 경영인으로서 나를 중간평가하기는 이르지만 경영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박 부회장은 '변화를 리드하는 것이 경영의 요체'라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변화관리란 말이 있잖아요. 변화에 끌려다니는게 아니라 앞서 이끌고 가는 이에게만 미래가 보장되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그 핵심은 역시 사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잠재력과 실천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로서의 경영이죠.제가 존경하는 GE의 잭 웰치 회장도 직원들의 열정, 의욕, 참여의지를 높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열정 소신 추진력 등의 단어로 표현되는 나의 캐릭터도 이같은 철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박 부회장은 또 '현장중심 경영'을 강조한다. 데이콤에 와서는 이 원칙이 'CEO 마케팅'으로 현실화됐다. 각 사업부문을 관장하고 있는 임원들을 소(小)CEO로 부르고 영업력 증대에 몸소 나서라고 입이 닳도록 주문하고 있다. 그 자신도 현장에서 바로 계약서를 쓸 수 있도록 실무 대리 한명을 데리고 수십억원대에서 수백억원대의 계약건을 따내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다. 그래서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나 돼야 퇴근한다. '세븐 일레븐'이란 새로운 별명도 생겼다. 박 부회장은 경영 투명성이 조직 활성화의 요체라고 본다. 매주 월요일에 열리는 경영위원회 회의 내용을 말단 직원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도록 전달하라고 사업부문장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지난주 현금이 얼마 유입됐고 지출이 얼마며 따라서 유동성 잔액이 얼마 있다는 세세한 내용까지 공개하고 있다. 또 목요일 오후에는 직원이면 누구라도 대표이사실을 찾을 수 있도록 개방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판공비 내역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가장 아래에 위치하게 하고 말단 직원을 제일 위로 올린 역피라미드식 조직도를 걸어두고 하루에 두세번 투명경영을 다짐한다. 데이콤 노사가 평화선언를 하게 된 것도 박 부회장의 이런 경영스타일에 힘입은 바 크다. 민주노총계열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데이콤 노조가 평화선언에 동참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다. "이제 스스로를 정보통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이콤을 마지막 직장으로 알고 혼신의 힘을 기울일 작정입니다" 장규호 기자 seinit@hankyung.com --------------------------------------------------------------- [ 약력 ] 생년월일 = 1939년 12월7일(음력) 출신학교 = 대구 계성고, 서울대 외교학과, 미국 뉴욕대 경제학 석사 주요경력 = 경제기획원 경제조사과장(75년) 대통령 경제비서관(89년) 통상산업부 차관(94년) 한국중공업 사장(96년) LG상사 부회장(99년) 데이콤 부회장(2001년 2월~현재) 가족관계 = 김에스더 여사와 3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