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헤어지게 된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69년이었다.

당시 직원들은 내가 이 회장과 가족들을 모시고 골프를 치면서 월급도 제일 많이 받고 골프숍에다 연습장까지 운영하는 것에 대해 시기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월급날로 기억하는데 월급봉투에 나도 모르는 외상값이 공제돼 있어 지배인에게 "이게 뭐냐"고 따졌다.

마침내 시비가 붙어 주먹을 휘둘렀는데 지배인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나가 떨어졌다.

부랴부랴 물을 끼얹어 깨우는 소동을 벌이고 난 뒤 서로 ''없던 일로 하자''며 넘어갔다.

바로 다음날 나는 서울CC에서 개최된 PGA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직후 안양CC에 출근했다.

이 회장이 라운드를 하러 오신다고 해서 평소처럼 1번홀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회장은 인사를 받고도 아무 말씀을 안하셨다.

동반자들이 전날 나의 우승을 칭찬하는데도 이 회장은 모른 척했다.

순간 나는 이 회장이 지배인과의 다툼사건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안양CC를 찾으면 제일 먼저 나를 찾을 정도로 애정과 관심을 보여준 이 회장이 그날 나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차가웠다.

라운드를 끝내고 배웅을 나가도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이래선 안되겠다싶어 그날 밤 장충동 이 회장댁으로 찾아갔지만 면회요청은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1주일 뒤 나는 회사에 사표를 냈고 그 보름쯤 뒤 사표가 수리됐다.

이 회장을 다시 뵙게 된 것은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70년 1월이었다.

당시 이 회장의 큰아들인 이맹희 부사장이 나를 불러 이 회장에게 안내했다.

이 회장은 나를 보자 "내가 널 좋아하고 사랑했는데 너와 헤어져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어떻게 지냈느냐" "생활이 어렵지는 않느냐"며 물었다.

이 회장은 "더 열심히 하라"며 선뜻 1백만원을 건네주었다.

당시 집값이 50만∼6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회장의 배려 덕에 70년 아시아서키트에 처음 편입된 한국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72년까지 내리 3연패를 했다.

또 72년에는 일본오픈에서 일본의 골프영웅 점보 오자키를 1타 차로 누르고 우승을 따내 73년 한국인 최초로 마스터스에 초청받아 참가했다.

마스터스에 다녀온 뒤 이 회장을 우연히 골프장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이 회장은 "외국에서 우승을 하고 세계적인 대회에도 나가는 모습을 보니 장하다"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격려해 주었다.

정리=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