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난 4월 중순에서 5월 중순 사이 증권사 영업창구 직원들은 곤욕을 치렀다. "상장기업 분석"을 왜 빨리 주지 않느냐는 고객들의 불평이 빗발쳤다. 상장기업 분석은 증시에 공개된 기업의 재무제표나 실적 등을 기재한 책자. 정보가 적은 소액주주로선 기업에 접근하는 "소중한 통로"다. 증권사들은 12월 법인들의 결산 자료를 상장사협의회에서 넘겨받아 보통 4월 중순께 발간했다. 그런데 올해는 5월초에도 나오지 않았으니 고객들의 아우성은 당연했다. "깐깐해진 외부감사"가 주된 배경이다. 지난 2월초 대우통신 최고경영자와 담당 회계사가 분식결산으로 함께 구속됐다. 이에 따라 외부 감사는 여느 때보다 신중하게 이뤄졌다. 감사의견은 당연히 늦어졌고 주총 일정과 상장사협의회의 자료취합도 순연될 수밖에. 증권투자자들의 이같은 아우성에 대해 하상주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본부장은 "가치주가 제대로 대접받는 기반이 국내 증시에도 마련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국내 기업들은 IMF 사태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다퉈 도입했다. 경영.회계 투명성과 관련된 베스트 플랙티스(선진 제도)들이 주류였다. 기업 신인도를 높여 국제 경쟁력을 키우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럼에도 신인도는 오르지 않았다. 일감을 의식한 회계 법인이 기업의 재무 문제를 눈감아 주는 '악어와 악어새' 관계가 유지돼온 때문이다. 이런 공생관계도 막을 내리고 있다. 회계 법인의 '제 목소리 내기'는 감사의견 거절 업체수 추이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상장.등록된 기업중 '의견거절'을 받은 곳은 98년 6개, 99년 13개에 이어 2000년에는 26개로 늘었다. 전체 외부감사 법인을 대상으로 삼으면 1백17개→1백50개→1백62개로 증가한다. 재무제표를 믿을 수 있게 회계 불투명성이 상당규모 여과됐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알 경영'은 해당 기업의 신뢰도에만 영향을 미치는게 아니다. 가치주가 영롱한 빛을 발하도록 돕는 '프리즘'이기도 하다. 유럽계 자금의 한국 투자 창구인 아틀란티스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는 주로 코스닥시장에 투자해 왔다. 이 회사의 심규환 서울사무소장은 "간판급 기업의 재무제표에도 거품이 많다고 인식해 얼마 전까지는 고위험 고수익의 코스닥시장을 선호했지만 최근 상장기업들의 투명성이 높아져 이들 기업에 대한 투자를 고려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높고 상승탄력이 큰 가치주가 투자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했다. 급변하는 기업경영 패턴도 가치주를 돋보이게 만드는 요인이다. IMF체제 이후 재계에는 '주가=기업실적=CEO 능력'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성립됐다. CEO들도 주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기업들이 사외이사를 모셔오고 고배당을 통해 소액주주 권익 보호에 안간힘을 쓰는 까닭은 주가관리에 실패한 최고경영자가 발붙이기 힘들다는 생존 논리 때문"(전경련 관계자)이라는 지적도 있다. 고배당도 가치주 투자의 든든한 원군이다. 국내 기업의 배당수익률은 아직 다른 나라보다 낮다. 그렇지만 평균 배당률과 배당금은 증가세다. 여기에 인플레이션과 세금을 감안한 연 이자율이 0%에 근접하는 저금리 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치주는 상당한 매력이 있다. 삼성증권 김지영 투자정보팀장은 "금리가 계속 떨어지면서 새로운 투자처를 찾는 자금이 늘고 있다"며 "가치주는 훌륭한 대안"이라고 밝혔다. 시세 차익을 겨냥해 리스크를 떠안고 주식을 사느니 안정적이면서도 배당이 많은 가치주를 사두면 실세금리를 웃도는 수익이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결국 저금리 시대에는 배당성향(배당금을 당기순이익으로 나눈 수치)이 높은 가치주가 매력 만점이라는 얘기다. 기업들은 이제 규모 중심의 '선단식'에서 '주주 중시 경영'으로 패러다임을 바꿔 가고 있다. 그에 따라 가치주들의 주가 제자리 찾기도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박기호 기자 kh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