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부장관이 한국을 다녀갔다.

한국에서는 이를 미국이 대북(對北)정책 검토를 조속히 마무리하고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접촉도 곧 재개할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인식은 한국정부의 아전인수(我田引水)적 기대일 뿐 미국의 기본적 대북정책은 아직도 ''검토 중''이며 크게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는 게 워싱턴의 평가다.

우선 아미티지 부장관은 그 자신이 대북 매파다.

대북 강경노선을 저변에 깔고 있는 이른바 ''아미티지 보고서''는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동안 한반도에 미국이 북한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할만한 획기적 변화가 있었던 것 또한 아니다.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사일실험 유예를 재확인하는 등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신문을 통해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사람들을 만나면 묘사하는 ''북한 그림''과 북한의 실제 그림과는 적지 않은 괴리가 있다는 것이 미국의 인식이다.

큰 그림에서 보면 아미티지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MD)계획''을 선전하러 온 ''세일즈맨''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이다.

MD에 대한 세계의 부정적 반응을 의식해 부시는 세 팀의 ''설득조''를 구성, 각국에 동시에 파견했다.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이 이끄는 유럽 설득조와 이탈리아 터키 등 지중해 및 근동 루트를 맡은 마크 그로스먼 국무부 차관, 그리고 한국 일본 인도를 순방한 아미티지 팀이 그것이다.

따라서 한국을 찾은 아미티지의 주목적은 부시가 내놓은 ''신상품'' 선전에 있었다.

물건을 팔러 온 아쉬운 입장에서 성의를 다해 ''고객''의 목소리를 경청한 것일 뿐이다.

결국 테이블에 마주 앉은 한국과 미국은 각자에게 유리한 꿈을 꾸는 전형적 동상이몽(同床異夢)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어찌됐건 부시가 내보낸 이 세 팀의 세일즈활동은 일단 실패작이었다는 것이 워싱턴의 자체분석이다.

무엇보다 유럽루트를 맡은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독일과 러시아의 강한 회의론에 직면해야 했다.

실상 독일은 1972년 미국과 구소련이 서명한 대륙간탄도탄금지조약(ABM)의 덕을 톡톡히 본 나라다.

치열했던 미국과 구소련의 군비경쟁은 이 조약을 분수령으로 소강국면을 맞았으며 결국 ''냉전(冷戰)의 벽''을 넘어 동서독일통일까지 이어지는 기초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 독일이 ABM의 파기나 수정을 전제로 하는 ''부시의 신상품''에 쉽게 현혹될 리 없다.

오히려 부시가 제안한 MD가 러시아를 자극, 새로운 군비경쟁을 유발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외무부 또한 울포위츠와의 회담이 끝난 후 "미국은 MD가 지난 30년간 잘 운영되어온 ABM의 기본정신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체안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전통적 맹방인 한국과 일본정부조차도 "설명하겠다니 들어는 보겠다"는 식의 미온적인 입장이기는 마찬가지다.

파키스탄, 그리고 중국과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인도만이 유일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부시가 제안한 MD계획의 논리적 핵심은 세계를 이른바 ''불량국가(rogue)''의 미사일 핵 도발로부터 보호하자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 이라크 이란을 불량국가의 표본으로 지목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북한을 화해와 협력의 대화상대로 취급해버리면 MD계획의 논리적 기둥 하나가 무너지는 셈이다.

세일즈를 위해 논리적 뼈대를 더 보강해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이 미국이다.

그런데 그중 가장 중요한 논리적 기둥이랄 수 있는 북한을 빼버리고 스스로의 발등을 찍어가며 MD계획 자체를 없던 일로 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양봉진 워싱턴 특파원 yangbong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