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의 한국 진출은 전통 제조업에서부터 금융 주식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융단폭격'' 식으로 전개돼 왔다.

이는 지난 97년말 IMF관리체제에 접어들면서 금융에서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장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달러화가 절실했던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직접 외자유치에 나설 정도로 ''외자 대환영'' 플래카드를 높이 걸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들은 자산 가치가 폭락한 한국 기업을 골라 사갔고 외자 기업들은 ''구원군''으로 행세하게 됐다.

이제 전 업종에 걸쳐 강력한 시장지배력을 가진 외자계 기업들을 어떻게 토착화시키고 토종 기업들이 ''외자충격''에 어떻게 성공적으로 적응하느냐에 따라 한국 경제의 명운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아직도 국내 기업들은 ''적응법''을 확실히 체득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삼성그룹조차 ''글로벌 체제에의 대응 태세''를 최고의 전략과제로 삼을 정도로 고심하고 있다.

외자는 이제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버팀목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극단적이다.

"한국의 경영 풍토를 선진화하고 개혁을 유도하는 복음"이라는 시각과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고스란히 외국인 손에 넘어가는 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인천대 이찬근 교수)이라는 지적이 대립한다.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외자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평가는 일단 긍정적인 면이 더 크다는 게 중론이다.

LG경제연구원의 이원흠 상무는 "외환위기 이후 국내 우량 기업들이 선진 리스크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고 주주 중시 경영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외자계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문제는 앞으로 외자계가 어떤 행태를 보일지가 미지수라는 점이다.

김석중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는 "외자는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면서 "우리의 경영 기술 풍토 등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야 외자계도 그에 걸맞은 행태를 보이게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전통 제조업은 외자계의 각축장=외자계는 거의 모든 업종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다.

르노의 삼성자동차 인수,다임러 크라이슬러의 현대자동차 지분(10%) 참여에 이어 대우자동차까지 제너럴모터스(GM)로 매각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완성차 업계는 외자계의 각축장으로 변할 전망이다.

대형 부품업체는 현대모비스를 제외하곤 모조리 외자계의 수중에 들어갔다.

LG산전에서 떨어져나온 LG오티스는 엘리베이터 부문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고 삼성중공업으로부터 중장비와 지게차 부문을 각각 인수한 볼보와 클라크는 선두 대우종합기계와의 간격을 바짝 좁혀놓았다.

클라크 관계자는 "본사의 연구개발(R&D)센터를 창원으로 이전하고 투자도 늘리고 있기 때문에 한국 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정유사는 1위 SK를 제외한 3개사가 외자계로 탈바꿈했으며 폴리우레탄(MDI) 카본블랙 부문에선 한국바스프 금호미쓰이화학 데구사 등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외국인이 좌지우지하는 증시=요즘 증권 투자자들의 아침은 전날 밤 미국 나스닥시장 동향을 체크하는 데서 시작된다.

과거 정치나 정부 정책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다.

국내 우량기업들의 주식을 대량 매수해 증권시장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한 외국인들은 미국 시장 등락에 따라 사고파는 행태를 반복한다.

외국인들은 국민 주택 한미 신한 제일 등 주요 은행들의 지분을 50% 이상 소유하고 있다.

한국 기업의 간판격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보유 비중도 절반을 넘어섰으며 SK텔레콤의 지분은 49%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말 외국인이 보유한 상장 주식의 시가총액은 전체 시가총액의 31.1%까지 치솟아 사상 최고수준을 기록했다.

모 기업 관계자는 "외국인이 마음만 먹으면 전문경영인 등과 제휴해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내부 지분율이 낮은 재벌그룹들은 이 점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기관도 장악=제일 한미 하나 국민 외환 등 외국인들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는 5개 은행의 여·수신 시장점유율은 40%를 넘어선 지 오래다.

국민 주택의 합병으로 탄생할 거대 은행도 골드만삭스와 ING베어링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외국인이 1대 주주이거나 경영권을 갖고 있는 증권사의 시장점유율은 20%를 넘어섰다.

지난 97년 점유율은 3.9%에 불과했다.

대형 증권사인 현대증권이 미국 AIG에 매각될 경우 외자계의 점유율은 껑충 뛰어오를 것이 틀림없다.

굿모닝투신운용의 강창희 고문은 "외환위기 이후 6개 부실 증권사가 퇴출되면서 투자자들의 주문이 외국 증권사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보험업계에선 독일 알리안츠가 지난 99년 제일생명을 인수하면서 국내 교두보를 확보한 데 이어 메트라이프 뉴욕생명 등이 잇따라 진출했다.

외자계 생명보험사들의 시장점유율도 지난 97년 1.3%에서 10% 수준으로 증가했다.

기획취재부 오춘호.조일훈.장경영 기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