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스톨(47) 르노삼성자동차 사장 집무실에는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오전 한시간반 동안 "출입금지" 팻말이 붙는다.

그가 한국어 개인 교습을 받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국 도사(道士)''를 목표로 하고 있는 스톨 사장은 이 시간만큼은 만사 제쳐 두고 한국어 배우는데 전념한다.

"지금 한국인의 촌수 관계를 배우고 있습니다. 저 같은 외국인들에게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논리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9월 부임한 스톨 사장은 "한국"을 알기 위해 바쁘게 지내고 있다.

도서관에서 한국 관련 서적들을 두루 섭렵했으며 이청준씨의 "당신들의 천국" 등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 소설을 구입해 읽었다.

12월에는 우리 전통 떡과 과자로 백일상을 차려 놓고 르노삼성차 출범 1백일 기념행사도 가졌다.

당시 그는 이곳 저곳을 수소문해 색동 한복을 장만, 행사에 직접 입고 나오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풍습 관습을 알기 위해 점심은 주로 회사 근처 한국 식당을 이용한다.

매주 한번 부산공장과 영업소를 방문할 때도 되도록 한국 음식을 찾는다.

그런 사정으로 서울 음식은 양념이 부드럽고 부산은 짠 음식이 많다는 정도까지 알게 됐다.

주말이면 그는 가족들과 함께 고궁을 둘러본다.

이런 사정으로 스톨 사장은 사내외에서 비교적 한국 문화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낯선 한국 땅에서 스톨 사장은 제품의 질 못지 않게 "현지화"에 승부를 걸고 있다.

서비스 경영기법 제품 등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국의 종업원들과 소비자, 그리고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르노삼성차를 외국 회사가 아닌 한국 회사로 국내에 뿌리내리게 하겠다는게 그의 경영 방침이다.

"경영 방침은 현지의 문화에 따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르노 본사의 경영 원칙을 획일적으로 적용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효율성을 중시하는 본사의 기본 지침은 르노삼성차에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스톨 사장은 우선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회사 경영에 접목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직원들의 성향은 어떤지, 다른 외국인 회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등을 꼼꼼히 점검하고 여러 사람들과 만나 의견을 듣고 있다.

그는 한국 기업의 노사관계가 원만한 편이고 일에 대한 임직원들의 열정도 높지만 회사 내부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또 수평적 관계보다는 수직적 관계에 치중돼 산업 전반의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외적인 화려함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유럽 기업인답게 스톨 사장은 르노삼성차를 경영하는데 있어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최근 발표한 "중장기 발전계획"에도 그의 이런 경영 지침이 잘 나타나 있다.

SM5 외에 르노삼성차가 새로 내놓을 신규 모델은 내년 하반기께로 멀찌감치 잡혀 있다.

현재 연간 24만대 규모의 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올해 생산 목표는 7만대를 넘지 않는다.

미국 시장 진출보다는 당분간 내수 시장에 주력할 계획이다.

개발비는 내부 자금으로 충당할 방침이다.

일부 직원들은 "너무 느려 터져서..."라고 불만을 털어 놓기도 하지만 스톨 사장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일단 SM5와 SM3로 국내 승용차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 준중형 부문에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생각이다.

향후 3년간 부품 구매비를 20% 줄이고 비핵심 업무는 과감히 아웃소싱하는 등 생산성을 높여 늦어도 2004년까지 회사가 이익을 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르노삼성차는 장기적으로 르노-닛산과 연구개발(R&D)을 공유하고 닛산과 플랫폼(차대)도 함께 사용하게 된다.

이 때문에 르노삼성차가 프랑스 르노의 단순 생산기지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스톨 사장은 "결코 그렇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경쟁업체인 현대.기아자동차와도 부품을 같이 구매하는 등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게 그의 전망이다.

스톨 사장은 80년 르노에 입사한 후 재무 행정 인사 구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으며 사내에서는 재무통으로 불린다.

그는 83~87년 르노의 상용차 부문 자회사인 벌리엣 나이지리아의 관리담당 이사를 맡아 부도 직전의 회사를 3년만에 흑자로 전환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가 르노삼성차의 초대 사장이 된 것도 이런 경력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스톨 사장은 일본 닛산자동차를 맡아 혁신적인 구조조정으로 화제가 됐던 카를로스 곤 사장과 생일이 하루 차이나는 동갑내기다.

곤 사장이 본사 수석 부사장으로 있을 때 그는 엔지니어링과 생산.구매 총괄 담당을 맡았었다.

"르노의 기술과 삼성의 마케팅 능력을 조화시켜 한국에서 새로운 자동차 역사를 만들겠습니다"

그가 곤 사장 못지 않게 르노삼성차를 세계적인 회사로 키울지 관심이다.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