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동 전문기자의 '유통 나들목'] 개성상인 후예들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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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안방극장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왕건은 개성(송악)을 본거지로 한 거상 왕륭의 아들이다.
19세때 궁예 휘하 장수로 들어가 42세때 비로소 왕의 자리에 올랐다.
왕건의 등극을 뒷받침한 게 바로 개성의 상업세력이었다.
개성상인은 신용을 중시하고 상기(商機) 포착에 능하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개성상인들은 그러나 1945년이후 고향에서 능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다.
북한땅이 공산주의 나라로 변하자 이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맨 주먹으로 회사를 차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성환 태평양 회장과 임광정 한국화장품 전 회장.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화장품 장사로 큰 돈을 모아 성공 신화를 이뤄냈다.
비슷한 길을 걸어온 이들 두 사람의 삶은 노년에 접어들면서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서 회장은 유유자적한 노후를 즐기는 반면 임 전 회장은 회한을 곱씹는 때가 많다고 주위에선 전한다.
1924년생인 서 회장은 가업으로 물려받은 화장품 장사에 일찍부터 눈을 떴다.
개성시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후 16세부터 화장품 제조와 판매를 익혔다.
당시는 화장품이래야 가루분과 포마드,구리무(크림)가 전부인 시절이었다.
1948년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 서 회장은 중구 회현동에 태평양화학공업사란 간판을 걸고 사업을 확대,탄탄대로를 걸어왔다.
그는 사업뿐아니라 자식농사에서도 성공했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차남 서경배 태평양 사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이 회사는 매출과 이익이 급신장하고 있다.
임 전 회장은 1919년생으로 일제때 개성공립상업학교를 나왔다.
봉급쟁이를 하던 그는 1961년 한국화장품을 세워 대표이사가 된다.
사업자금은 충북 증평 출신 갑부였던 김남용(명예회장,1997년 작고)씨가 댔다.
두 사람은 끈끈한 동업자이자 사돈관계가 됐다.
임 전 회장의 장남 임충헌 한국화장품 회장과 김 명예회장의 차녀 옥자씨가 결혼한 것.
그러나 찰떡궁합으로 보이던 동업자 사이도 세월이 흐르면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임 전 회장은 1988년 자신의 분신격인 한국화장품을 떠나야 했다.
타의에 떠밀려 경영권을 장남에게 넘긴 뒤 3남이 운영하는 한불화장품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성상인의 후예로 꼽히는 두 사람의 노년은 이렇듯 대조적이다.
그 변수는 능력이나 운이 아니라 ''가족애''였다.
cdkang@hankyung.com
이 드라마의 주인공 왕건은 개성(송악)을 본거지로 한 거상 왕륭의 아들이다.
19세때 궁예 휘하 장수로 들어가 42세때 비로소 왕의 자리에 올랐다.
왕건의 등극을 뒷받침한 게 바로 개성의 상업세력이었다.
개성상인은 신용을 중시하고 상기(商機) 포착에 능하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개성상인들은 그러나 1945년이후 고향에서 능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다.
북한땅이 공산주의 나라로 변하자 이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맨 주먹으로 회사를 차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성환 태평양 회장과 임광정 한국화장품 전 회장.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화장품 장사로 큰 돈을 모아 성공 신화를 이뤄냈다.
비슷한 길을 걸어온 이들 두 사람의 삶은 노년에 접어들면서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서 회장은 유유자적한 노후를 즐기는 반면 임 전 회장은 회한을 곱씹는 때가 많다고 주위에선 전한다.
1924년생인 서 회장은 가업으로 물려받은 화장품 장사에 일찍부터 눈을 떴다.
개성시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후 16세부터 화장품 제조와 판매를 익혔다.
당시는 화장품이래야 가루분과 포마드,구리무(크림)가 전부인 시절이었다.
1948년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 서 회장은 중구 회현동에 태평양화학공업사란 간판을 걸고 사업을 확대,탄탄대로를 걸어왔다.
그는 사업뿐아니라 자식농사에서도 성공했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차남 서경배 태평양 사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이 회사는 매출과 이익이 급신장하고 있다.
임 전 회장은 1919년생으로 일제때 개성공립상업학교를 나왔다.
봉급쟁이를 하던 그는 1961년 한국화장품을 세워 대표이사가 된다.
사업자금은 충북 증평 출신 갑부였던 김남용(명예회장,1997년 작고)씨가 댔다.
두 사람은 끈끈한 동업자이자 사돈관계가 됐다.
임 전 회장의 장남 임충헌 한국화장품 회장과 김 명예회장의 차녀 옥자씨가 결혼한 것.
그러나 찰떡궁합으로 보이던 동업자 사이도 세월이 흐르면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임 전 회장은 1988년 자신의 분신격인 한국화장품을 떠나야 했다.
타의에 떠밀려 경영권을 장남에게 넘긴 뒤 3남이 운영하는 한불화장품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성상인의 후예로 꼽히는 두 사람의 노년은 이렇듯 대조적이다.
그 변수는 능력이나 운이 아니라 ''가족애''였다.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