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법원 담장 옆에 동화 같은 3층 집이 하나 있다.

이국풍의 외벽에 앙증맞은 우편함이 눈길을 끄는 건물.

엄상익(47) 변호사가 어릴 때부터 꿈꾸던 ''작은 점방''이다.

몇년 전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서 보았던 어촌 집을 모델로 그가 직접 꾸몄다.

법조생활 19년 만에 마련한 서른평 공간.

1층은 사무실,2층은 살림집,꼭대기층은 쉼터다.

햇살이 따뜻한 이 곳에서 그는 날마다 세상을 향해 편지를 쓴다.

수신인은 우리 시대의 수많은 ''성자''들.

그의 글은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 내려앉아 민들레 홀씨같은 희망을 싹틔운다.

이번 주말께 나올 책 ''변호사와 연탄 구루마''(좋은책만들기,8천원)도 그 씨앗들 중의 하나다.

그동안 8권의 책을 냈으나 이번 책의 의미는 또 다르다.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작품인 셈이다.

지독한 가난을 딛고 여덟번 만에 고시에 합격한 뒤 남들 다 부러워하는 판·검사 제쳐두고 불우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돈 안되는 짓''만 골라하는 만년 소년.

일부러 화제의 인물만 좇아다니며 ''뜨려 한다''는 비난도 감수하고 끝까지 꿈을 버리지 않는 그의 내면이 책 속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부자집 아들에게 칼을 맞고 오히려 무기정학을 당했던 일.

그는 가난한 아버지를 원망했고 사회를 증오했다.

그러나 하늘은 어리석은 자에게 함부로 칼을 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내가 세상을 미워하면 세상도 나를 미워한다''는 이치를 뒤늦게야 깨달았다.

가슴속에 박힌 가시를 뽑아버리자 마음의 눈이 열렸다.

그것은 이후의 삶에 엄청난 에너지의 원천이 돼줬다.

그래서 검은 법복보다 푸른 죄수복 쪽에 더 관심을 두게 됐다.

고시에 연달아 낙방하던 시절.

지금의 아내인 하영은 한결같은 믿음으로 그를 응원해줬다.

그러다 군대 문제가 닥쳐왔고 결국 그는 군법무관 시험을 거쳐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1979년 겨울에는 양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례와 신랑 신부 세사람 뿐인 ''도둑 결혼''을 감행했다.

신촌 산동네 두평짜리 방에서의 신혼 생활은 행복했고 또 고통스러웠다.

그는 전방에 지원하면 관사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백마고지 전투로 유명한 철원으로 갔다.

그곳에서의 첫 겨울.

이미 합격한 친구들이 찾아왔다.

온갖 허세를 동원해 껍데기 뿐인 자존심을 지켜려 애쓰던 그는 며칠 뒤 친구들의 편지와 소포를 받았다.

''한번 더 해봐라.요점정리 노트와 밑줄 친 책들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시험을 한달 앞두고 새벽 별을 쳐다보던 그는 뭔지 모르지만 기도 같은 게 하고 싶어졌다.

''이제야 저의 잘못을 알 것 같습니다.

당했던 설움에 보복하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고시를 꿈꿨는데 그런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칼을 주시지 않은 것은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지독한 좌절로 병이 들었으니 이 병만 고쳐주시면 연탄 구루마를 끌더라도 평생을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드디어 성공.

그야말로 7전8기였다.

그는 약속대로 헐벗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고난의 길을 자청했다.

무료변론만 수백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창원과 조세형의 경우도 그 중 하나다.

그토록 신경썼던 조세형이 일본에서 또 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참담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일곱번의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는 친구들과 힘을 모아 중랑구청 옆 뚝방동네에 자활촌 ''성애원''을 만들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20년간 교도소 공장에서 하루 8백원씩 받아 1백만원을 저금했다고 자랑하는 강도범에게 돈의 의미를 배우기도 한다.

그는 마흔이 넘으면서 책을 읽을 때마다 일련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전공서적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1천1백50권.

환갑 때까지 읽은 뒤 재소자들에게 기증해 도서실을 만드는 게 꿈이다.

루소의 ''참회록''을 읽을 때 느낀 그 오래 익힌 누룽지 같은 감흥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