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들면 마음이 열린다.

스스로를 지킨다는 생각에 어쭙잖이 쌓아올린 심리적 장벽, 그 높은 경계가 허물어져 내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고받는 인사말.

소리가 아닌 가벼운 고개짓 하나로도 낯선이와의 거리감이 좁혀진다.

같은 산길을 오른다는 희박한 동류의식을 넘어 너와 나 분별없이 어울리려는 뿌리속 갈망의 소산이다.

"크고 밝은 뫼"란 고운 우리말 뜻의 태백산(1567m).

한겨울 칼바람속의 태백산행 역시 마음의 빗장을 푸는 데서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눈꽃과 얼음꽃이 지어낸 순백의 세상에 막 들어서려 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인사로 반긴다.

산행 들머리는 화방재 아래의 유일사매표소 쪽이다.

당골광장과 백단사에서도 산행을 시작하지만 유일사쪽이 아기자기하고 오르기 편해 사람들이 몰린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하나 둘 짝지어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완만한 오름길의 다져진 눈 위엔 먼저 오른 이들의 아이젠 자국이 남아 어지럽다.

발길 닿지 않은 주변 눈밭의 나무는 까까머리 중학생의 조금 자란 머리칼처럼 곧추서 산행길을 지켜본다.

천제단까지 3.4km, 또 2.9km 남았다는 방향표지판을 뒤로 한 지 50분쯤.

모퉁이를 돌자 나타나는 평탄한 길이 반갑다.

다시 몇걸음.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얼음꽃 핀 주목 한그루가 위용을 자랑한다.

일련번호 7-7-1-1.

16m 높이의 5백살된 주목이다.

험하지는 않지만 다부진 몸집이 크고 늠름해 매력적인 태백의 남성미를 한껏 돋워주는 주인공이다.

어렵지 않은 길을 따라 다시 10분.

이쪽 오름길의 마지막 화장실을 지나 아래 계곡으로 연결된 삭도시설의 산막앞 나무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이번엔 당골쪽에서 넘어온 산행객이 먼저 마음을 열어보인다.

11시 방향으로 난 나머지 산길로 들어선다.

굵은 밧줄이 이어진 길은 이제까지와는 딴판이다.

그제서야 깊은 산속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든다.

머리 위를 가로지른 나무에는 제각각 눈꽃과 얼음꽃이 피어 하얀 터널을 이룬다.

뜻밖에도 푸근하다.

곳곳의 주목나무에 핀 얼음꽃은 정성들여 만든 거대한 미술작품처럼 빛난다.

얼음꽃 터널은 트였다 막혔다를 반복한다.

개구마리(때까치)인지 무당새(딱새)인지 모를 작은 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안내한다.

다른 차원의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뒤.

갑자기 하늘이 트인다.

천제단 앞 공터다.

짙은 안개 뒤로 숨었던 해가 백짓장처럼 창백하지만 또렷한 윤곽의 얼굴을 드러낸다.

겨울태백의 비경을 담으려는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거센 바람과 안개가 그들을 훼방놓는다.

안개 때문에 장쾌한 백두대간의 흐름을 보지 못한게 아쉽다.

천제단 앞에 선다.

"ㄷ"자 형상의 돌제단, 태고적부터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이란다.

실꾸러미에 매달린 북어가 무섭도록 하얗게 얼어 있다.

귀도 얼어 얼얼하다.

하산길은 당골쪽이다.

단종이 태백산신이 되었다고 믿어 세운 단종비각을 거쳐 망경사로 내려간다.

한국명수 1백선중 으뜸이라는 망경사내 용정은 두터운 눈이 덮여 표지판으로만 알수 있다.

하산길이 선사하는 뜻밖의 즐거움은 엉덩이썰매 타기다.

비닐포대만으로도 하산길을 신나게 앞당길수 있다.

하산길끝 단군성전을 지나면 눈꽃축제 때 설치해 놓은 눈조각 작품이 기다린다.

모두 4시간여의 겨울 태백산행.

당골계곡 바위굴 앞에서 본 한 무속인의 낭랑한 축원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조상님네들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