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금융계에서 지금까지 못 보던 일이 벌어졌다.

정부의 회사채인수방침에 대해 은행이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정부의 보호와 규제 아래 잘 길들여진(?) 우리 금융계를 생각할 때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이 은행의 외국계지분이 다수이고,행장이 외국인이란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국가적 과제인 구조조정에 이 은행이 공공성을 저버리고 협조하지 않는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하지만 이는 그간 정부가 발벗고 나서 적극 추진한 외국인투자 유치가 가져온 결과이자 성과(!)다.

정부는 외국인투자가 가져오는 여러 가지 혜택 중 하나가 ''선진경영기법의 도입''과 ''경영의 투명성 확보''라고 말해 왔다.

즉 뒤처진 우리 경제의 틀과 제도를 글로벌스탠더드에 맞춘다는 것이다.

외국인 행장은 회사채 인수제도가,정부가 말한 바로 그 글로벌스탠더드에 맞지 않아 ''노''라고 말한 것이다.

이같이 정부 정책에 대해 기업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다 한번 벌어진 해프닝이 아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다.

지금까지 한국인이 소유한 ''우리 기업''은 정부정책에 ''아니오''라고 말한 적이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정부 말 들어 손해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채산성이 있건 없건 공장만 지으면 돈을 지원해주고,이제는 기업이 어려워지니 공적자금을 인심 좋게 퍼주고 있다.

말이 기업보국(企業報國)이지,따지고 보면 정부와 우리 기업이 손잡은 정경유착이 가져온 엄청난 도덕적 해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땅에 새로운 종류의 기업이 생기고 있다.

바로 외국인투자기업이다.

이들은 한국인 소유의 우리 기업과 전혀 다른 경영철학과 국가관을 갖고 있다.

''정부지원이고 공적자금이고 관심 적으니 제발 쓸데없는 간섭하지 말고,자기들이 이 땅에서 마음껏 활동하도록 가만히 놓아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숨은 뜻이 있다.

첫째는 시장경제에 따라 투명하게 사업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정부가 구조조정이니,선진경제권 진입이니 하는 정책이슈를 내걸더라도 자신들의 이해와 엇갈리면 안 따르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외국인투자기업의 두번째 태도다.

이는 점점 정책이 우리 땅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에 과거와 같이 일사불란하게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학자들이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세계경제에서 힘의 우위가 국가(nation-states)에서 초국적기업으로 옮겨가고,국가의 정책주권(policy-sovereignty)이 위협받기 시작한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세계주의자들은 초국적기업이야 말로 각국에 구태의연하게 쳐진 장벽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글로벌스탠더드로 통일하는 첩경이라고 환호한다.

이를 놓고 1990년대 미국에서 ''누가 우리 기업인가''에 대한 열띤 논쟁이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라이시는 ''미국 땅에서 활동하는 기업''이면 모두 미국기업이라고 주장했다.

공장을 짓고 미국인에게 일자리를 주며 세금을 내면 됐지,기업의 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로라 타이슨은 ''미국인이 소유한 기업''만이 진정한 미국기업이라고 반박한다.

누가 뭐래도 미국인이 소유한 기업이 미국경제에 충성하고,국가정책에 잘 호응하며,핵심적 기술개발을 미국에서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후에 전개된 세계화의 흐름을 보면 라이시의 세계주의가 압승이다.

이제 눈을 우리경제로 돌려보자.앞으로 이 땅에 찾아올 외국기업이 늘어날수록 정부와 기업간의 관계가 변한다.

즉 ''노''라고 말하는 기업이 늘어나는 것이다.

정부가 투명하고 글로벌스탠더드에 맞는 정책을 펼치지 않으면 많은 기업이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라도 과거와 같이 기업의 애국심에 매달릴 수 없다.

이는 그만큼 경제적 자원을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 정부도 마냥 재벌만 두들기고 있을 게 아니라 보다 넓게 보며 ''노''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기업을 다루는 법을 배워나가야 하겠다.

syahn@ccs.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