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지 못하면 울부짖고 싶고 아무거나 때려 부수고 싶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터질 듯한 가슴의 응어리들을 그림에 쏟았어요"(산문집 ''침묵과 함께 예술과 함께''중에서)

8세에 청각을 잃는 신체장애를 딛고 한국 근대미술사와 현대미술사의 교두보 역할을 한 운보(雲甫)김기창 화백.

그에겐 ''한국화단의 거장'' ''인간 천연기념물'' ''한국의 피카소'' 등의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파란만장했던 삶과 2만여점의 방대한 작품들.

게다가 산수 인물 화조 등 한국화의 모든 영역에서 다양한 작업을 통해 항상 새로움을 추구했던 열정의 작가였다.

이종상 서울대박물관장은 "이지적 화가,테크닉에 능한 화가,정열적 화가가 있다고 할 때 운보는 이 모두를 초월한 작가"라며 "조선시대의 장승업,타계한 이응노 선생의 계보를 잇는 화가"라고 평가했다.

운보는 17세되던 1930년 이당(以堂)김은호에게 전통적인 산수화와 섬세한 인물화 기법을 배워 그림을 시작했지만 점차 자신의 감성과 개성을 살린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한가지로 일관된 게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변화 그 자체였다.

운보의 예술세계는 대략 △초기 구상미술 시기 △예수의 일생을 한국인의 모습으로 담은 신앙화 시기 △구상미술에서 추상으로 변하는 전환기의 ''복덕방''연작 시기 △청록 및 바보산수화 시기 △그리고 말년의 추상미술 시기로 나뉜다.

1951년 피란지 군산에서 그린 예수일대기에서는 성경의 내용을 도포와 갓을 쓴 조선풍속도로 그리는 새로운 해석을 보여줬다.

1959년 발표된 대작 ''군작(郡雀)''은 1천여마리의 참새떼가 싸우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생존경쟁을 표현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대표작으로 불리는 ''청록산수'' ''바보산수''시리즈를 선보였다.

특히 평생의 반려자였던 박래현 여사와 사별한 뒤 마치 한이라도 풀 듯 ''바보산수''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청록산수엔 호방함과 시원함이,바보산수엔 조선 민화의 대담한 변형과 자연스러운 생략 및 익살의 멋이 가득하다.

1만원짜리 지폐에 세종대왕 얼굴을 그린 인물로서 1993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팔순기념회고전'' 때는 하루에 1만명이 입장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지난해 12월 남북이산가족 상봉 당시 서울을 방문한 동생 기만(71·평양미술대교수)씨를 만나 평생의 한을 풀기도 했다.

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