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희 < 서울대 경제학 교수 >

새 천년 두번째 해가 시작됐다.

해는 지지만 어김없이 또 뜬다.

그러나 해는 아침에 뜨며 저녁에 진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뜰 조건이 구비됐을 때 뜨며 질 조건이 갖춰지면 반드시 지게 돼 있다.

2000년 새해 첫날 아침의 꿈이 마지막 날에 헛된 꿈으로 끝난 것도 뜰 때의 조건과 질 때의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그저 우연이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뜨라고 해서 뜨고 지는 게 아니다.

정책과 제도,구조와 관행,가치와 심리 등 경제와 관련된 요소들이 서로 어울려 자기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경제원리가 무엇인지 알기 힘들어 그렇지,이젠 누구도 이런 원리의 추세를 거스를 수 없게 되는 상황이다.

금융 기업 기술 노동 어느 것이나 덩치가 커지고 자기 논리가 형성돼 있어 이를 어기면서 강제할 수 없게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가 다시 뜰 수 있는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한 마디로 기업 부실,금융부실 그리고 사회 모든 부문의 부실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런 부실을 없앤다면 마치 인체의 세포가 살아 움직이듯 경제주체 모두 건강해질 것이 자명하다.

이중에서도 피부세포와 심장이나 뇌세포가 서로 다른 기능과 중요성을 가지듯,중요한 경제주체가 먼저 건강해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경제의 심장이나 뇌세포는 왜 병들어 있는가.

이는 싱가포르를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싱가포르는 35년이라는 짧은 기간내에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가구당소득 6만달러라는 성장을 이룩했다.

우리나라의 6배를 훨씬 넘는 부(富)를 향유하면서도 IMF 위기같은 태풍에도 끄덕하지 않는 건강함을 자랑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선 정치가 경제에 해독을 끼치지 않는다.

관료가 손발을 묶지 않는다.

노조가 발목을 잡지 않는다.

병원과 은행이 문을 닫지 않는다.

대학교수가 입시부정에 연루되지 않는다.

군용비행기가 부정 연료 때문에 추락하지 않는다.

모든 경제주체가 경제외적인 요인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효율적으로 자기 업무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아름답고 깨끗한 공원도시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싱가포르를 돌아본 뒤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번잡한 것이야 활발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건물 하나,도로포장 하나,거리의 교통이나 먼지에서도 부실과 무질서가 금방 감지된다.

이 모두가 횡행하는 경제외적인 요인에 의해 생성된,한마디로 ''바람직한 자본주의 정신이 상실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열심히 일해 부를 쌓아가긴 하는데 중간에 ''정치라는 도둑''이 빼어먹고,관료가 뜯어 먹고,법조인이 갈취하고,기업인이 횡령하고,노조가 드러누워 자기 몫을 챙기기에 혈안이다.

그러다보니 부가 새어 나가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고,도로가 파이고,데모와 싸움질이 성행하게 된다.

기업·금융 구조조정도 허탕이다.

공적자금을 1백조원,아니 2백조원을 털어 넣어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식''이 되고 만다.

만일 중간에 이렇게 빼어 먹는 것이 없게 된다면,내일이라도 빚없는 확대재생산구조가 형성될 것으로 확신한다.

노부모를 거리에 버리는 사람도,노숙하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 틀림없다.

KDI가 새해 경제전망으로 내놓은 ''반토막 성장예측''(성장률 작년 9.2%에서 5.1%로 둔화,수출증가율 21.0%에서 10.0%로 둔화,물가 상승률 2.3%에서 3.4%로 상승)도 거뜬히 넘어설 것이 확실하다.

증권시장에서 한해 2백조원을 날린 개미군단의 눈물도,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꺼져버린 벤처의 거품이 남긴 상처도 치유될 것으로 본다.

투기와 사기,이런 바람을 일으킨 정책의 실패만 없게 된다면 증시와 기술개발의 바른 기능이 곧 회복될 것이란 생각이다.

싱가포르와 우리나라의 이러한 차이가 없어지지 않는 한,앞으로 우리는 도저히 싱가포르를 따라 갈 수 없게 된다.반대로 이제 마음을 바로잡고 나라 구석구석의 부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올해안이라도 곧바로 싱가포르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신부터 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