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이제 며칠 남지않은 올해가 꼭 그런 것 같다.

''제2의 경제위기론''이 꼭 기우(杞憂)같지만도 않게 느껴지는 세밑 분위기는 새 천년의 첫 해라며 들떴던 지난 연초의 그것과 사뭇 대조적이기만 하다.

왜 이 모양이 됐을까.

코스닥은 5분의 1로,종합주가 역시 반토막이 난 가운데 끝난 증시 납회(納會)를 지켜보면서,경제에서의 인과율(因果律)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원인은 무엇이며,또 결과는 무엇인가.

경제가 나빠져서 주가가 폭락한 것인가,아니면 주가가 폭락했기 때문에 그 영향이 곳곳으로 번져 전체 경제가 이 모양이 된 것인가.

"물가는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돈을 풀어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 최고가격제 등 행정적인 힘으로 이를 억누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고 열을 올리던 일선기자 시절 만났던 물가당국자가 생각이 난다.

자리가 바뀐 뒤 그가 "물가상승을 감안할 때 통화공급을 늘리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을 바꿨다고 해서 나는 그를 탓할 생각은 없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또 그것이 새로운 원인이 되는 경제순환의 이치를 뒤늦게나마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면,아마도 겸손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인과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어 어느 것이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종잡기도 어려운게 오늘의 경제현상이 아닌가 싶다.

기업부실이 금융부실을 결과했다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지만,대출심사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과잉투자를 부추기는 근원적인 여건을 조성했다고 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다고 은행이 제 구실을 못한 원인이나 책임이 은행에만 있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정부에 더 큰 책임이 있다해도 지나치다고 하기 어려운게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원인이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는 논란이 과연 현실을 풀어나가는데 얼마나 보탬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일이다.

피터 드러커는 그의 저서 ''방관자의 시대''에서 그 자신을 방관자(Bystander)로 정의하면서 매우 의미있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방관자는 무대위의 연기자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관중도 아니다.

연극과 연기자의 운명은 관중의 반응에 의해 좌우된다.

방관자의 반응은 자기 의외의 누구에게도 효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방관자는 극장의 화기책임자와 매우 비슷하여 무대 한쪽에 서서 연기자나 관중이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을 본다"고.

평론이니 논평이니 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남의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책임하고 또 하기 쉬운 작업인 것처럼 여겨지는게 보통이다.

그 주제가 경제이면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경제현실을 다룬 글들이 정책당국자들에게는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상식적인 소리로, 이해당사자에게는 자신이 당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쉽게 하는 말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따지고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연휴를 농성으로 지샜던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파업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별로 설득력이 없었던 것 역시 그런 현상의 하나라고도 할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영하 10도의 추위속에 농성중인 국민·주택은행 노조원들에게 즉각 파업을 중단하라는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전체 나라경제를 위해서고 또 파업과 농성이 그들 자신에게 아무런 실익이 없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모두가 경제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내년 경제를 생각하면 정말 암담하기만 하다. 1·4분기에는 어렵겠지만 상반기말쯤부터 좋아질 것이란게 정부관계자들의 시각이지만,방관자의 입장에서 냉정히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그때쯤 좋아질 까닭이 무엇인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계층마다, 그리고 집단마다 제나름대로의 인과론으로 철저하게 무장,오늘의 경제현상이 빚어진 원인과 책임을 다른 곳에서만 찾고 있는 양상이고 보면 내년 하반기부터 좋아질 것이란 전망은 공허하기만하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란 얘기가 나와야 한다는 얘기는 남의 일이기에 쉽게 할 수 있는 소리고,또 그래서 설득력이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 본사 논설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