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은 현대건설에 대해 사재출연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데 반해 현대는 은행의 지원약속에 의구심을 보여왔다.

이런 상황이 협상을 꼬이게 했다.

은행의요구대로 할 경우 현대는 우선 연말까지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사재(계열사 지분), 현대건설의 계열사 보유지분, 부동산을 팔아야 한다.

또 현대의 기대대로라면 금융권도 서로 손발을 잘 맞춰 차입금의 만기를 연장해줘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그동안 되풀이돼 온 경험이다.

현대의 자구안은 금융권의 만기연장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라도 예정에 없던 차입금 현금상환 요구가 불거질 경우 현대건설은 또다시 유동성 부족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현대건설의 진로를 더욱 불명확하게 하는 것은 정부의 정책방향이다.

정부는 일단 ''회사는 살린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경영권 문제에 관한 한 생각이 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대 내부에서 ''정부가 법정관리의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간벌기에 나서며 오너의 사재를 최대한 끌어내려 한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구안 제대로 이행될까=우선 3천1백만평에 달하는 서산간척지 매각은 여전히 매각가격을 둘러싸고 정부와 현대그룹간에 의견차가 크다.

현대는 6천7백억원의 자체 감정가에서 2000년 공시지가인 3천6백21억원에 매각할 수 있다는 선까지 물러 섰지만 정부는 공시지가의 3분의 2 수준으로 매입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최대 1천5백여억원에 달하는 보유 계열사 지분을 처분해 사재를 출자하겠다는 계획도 현재와 같은 증시 여건에서는 살 곳이 별로 없는 만큼 제대로 이뤄질지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정 전 명예회장의 자동차 지분을 현대자동차가 매입한다는 설이 나돌았으나 현대자동차가 계열분리 과정에서 공정거래위원회에 ''현재의 지분에 변동이 없도록 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제출해 시장에서 매각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건설로부터 현대상선 지분을 인수한 것도 정몽헌 회장이 오는 25일 이후에나 현대상선 지분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한 임시방편이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현대전자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등 현대그룹내 계열사들과 계열분리된 현대자동차 및 정씨 일가 친족들의 위성그룹 계열사 지원이 거론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작은 것이 문제다.

계열분리라는 당초의 정책 취지에 맞지 않는데다 당사자인 해당 업체들도 사정이 좋지 않아 난색을 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달 30일 현대건설 1차부도 사태 이후 3일까지 연이어 현대그룹내 주요 계열사 사장단회의가 열렸지만 이제까지 현대엘리베이터가 지난 1일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15.16%(3백80억원 상당)를 매입해준 것이 유일한 지원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의 주선으로 3일 오전 정 전 명예회장이 입원해 있는 서울 중앙병원에서 가질 예정이었던 친족모임이 불발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모임에는 정상영 명예회장만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대의 향후 행보=현대그룹은 모기업인 현대건설을 반드시 지킨다는 자세다.

성역시됐던 오너 일가의 사재출자에 대한 정부와 채권은행단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출자전환이든 법정관리든 정부의 경영권 박탈 움직임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사재출자를 하는 만큼 연말까지로 시한을 둘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맡겨둬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유동성 위기가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그룹 일각에서는 최악의 경우 현대그룹이 당초 오는 2002년 이후 하기로 했던 현대건설 계열분리를 앞당겨 다른 계열사와 단절시키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것이 실현될 경우 현대중공업 등 다른 계열사의 계열분리도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희수 기자 m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