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자"가 아닌 "투자자"의 나라.

금융시장 구조로 미국을 설명할 때 흔히 동원되는 수사(修辭)다.

"밀레니엄 경제강국"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한마디로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증권 투자액이 금융기관 저축액을 훨씬 웃돌고 기업들도 차입금보다는 증권 발행을 통한 직접금융에 더 많이 의존한다.

월가 증권시장이 미국 경제의 핵(核)으로 뿌리내린 이유다.

미국 경제가 10년째 구가하고 있는 초장기 호황의 "비결"도 월가가 쥐고 있다는 지적이다.

월가의 그 비결을 시리즈로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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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브로드웨이.

나스닥 시황센터가 자리잡은 미드타운의 타임즈 스퀘어(41번가)에서부터 다운타운의 월가에 이르기까지 도로변 곳곳에서 붉은 바탕색의 작은 깃발들이 나부낀다.

"새천년 세계 수도(World Capital of the New Millenium)"라고 쓰인 깃발들이다.

세계 증권계의 양대 시장인 뉴욕 증권거래소(NYSE)와 나스닥을 한데 품고 있는 뉴요커들의 자부심이 물씬 배어난다.

어느새 뉴욕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된 NYSE.

매일 오전 9시부터 동남쪽 후문에서 시작되는 "뉴욕증시 교육 투어"를 총괄하고 있는 리처드 애더모니스 홍보본부장은 몇가지 지표로 NYSE가 세계 자본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절대성을 보여준다.

지난 8월말 현재 NYSE에 상장된 기업들의 시가총액 합계액은 12조9천억달러.

도쿄(3조6천억달러), 런던(2조7천억달러), 프랑크푸르트(1조5천억달러) 등 해외 주요 증시의 싯가총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큰 규모다.

여기에 나스닥의 싯가총액 6조3백억달러를 더하면 세계 자본의 뉴욕 편중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어렵지 않게 가늠케 된다.

뉴욕을 "세계 경제 수도"의 자리로 올려놓은데는 외국계 주식들의 "뉴욕행 러시"도 한몫을 거들고 있다.

뉴욕증시에 상장한 외국계 기업은 12일 현재 포항제철 주택은행 등 한국계 5개사를 비롯, 아시아와 유럽, 중남미 등지의 50개국 4백26개사에 달한다.

전체 상장기업수 대비 비중이 13%다.

레이몬드 벨 NYSE 신규 등록담당 부사장은 "향후 5년내 상장기업중 외국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25%선으로 높아질 전망"이라고 말한다.

상황은 나스닥도 비슷하다.

작년말 현재 외국계 상장 기업이 4백29개사. 올들어 신규 상장한 외국 기업은 NYSE의 배가 넘는 50여개사에 이른다.

월가를 "세계 최강"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비결은 무엇일까.

미 증권업협회(SIA)의 마거릿 드레이퍼 홍보팀장은 그 원천을 "증권 민주주의"로 설명한다.

"미국의 자본주의(시장경제)는 철두철미 증권시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경제활동 자금의 대부분이 증시를 직접 매개체로 삼는다.

저축자들은 여유 자금을 은행보다는 증권시장에 더 많이 맡기고, 기업들은 필요한 돈을 은행 등지로부터의 간접 금융보다는 주식 및 채권 발행 등을 통한 직접 금융방식으로 해결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증시의 투명하고 경쟁력있는 운영이 필수 불가결하며, 그 결과 세계 각지의 투자자와 자본 수요자들이 월가로 몰려들게 됐다.

" 드레이퍼 팀장의 말은 세계은행이 최근 내놓은 국별 금융통계에서 여실하게 확인된다.

통계에 따르면 작년말 현재 미국 기업들의 채권발행 잔액은 국내총생산(GDP)의 1백10%에 달한 반면 은행에서 차입한 금액은 GDP의 50%에도 못미쳤다.

투자자가 수천만명인 증권시장에서 대부분의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들로선 경영 현황을 수시로 증시에 공개하고 투명화해서 투자자들의 "심판"을 기다리는 일이 지상 과제다.

"시장"을 납득시킬 수 있게끔 투명 경영에 온 힘을 쏟게 되는 건 당연지사다.

뉴욕시립 호프스트라 대학의 이근석 교수(경영학)는 미국의 이런 경제 시스템을 정치적인 대중 민주주의에 비유해 "풀뿌리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증시를 매개체 삼아 원하는 사람이면 국민 누구나가 기업들의 진운, 나아가서는 국가 경제의 행로에 당당하게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끔 돼있기 때문이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 쿠퍼스(PwC) 회계법인의 한국부 대표인 조형택 파트너는 "미국 가계의 45%가 주식에 투자할 정도로 증시가 미 국내에서 광범위한 저변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증권 시스템에 대한 국민적인 신뢰가 그만큼 높다는 반증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풀뿌리"들의 기반 위에서 살아 숨쉬는 "증권 민주주의"야말로 월가를 세계 자본의 메카로 끌어올린 제1의 원동력이라는 지적이다.

뉴욕=이학영 기자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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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취재팀 ]

한상춘 전문위원
이학영 차장(국제부)
육동인 특파원(뉴욕)
강은구(영상정보부)
김홍열(증권1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