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외환위기 이후 위기극복과 개혁을 통해 새 경제의 틀을 구축하고 있다.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장기적인 안정·성장 기반을 배양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개혁과정에서 기존 이해관계에 변화가 오면서 갈등이 유발되고 이의 증폭이 그치지 않고 있다.

기득권익이 일부 축소되거나 새로운 이득계층이 창출됨에 따른 이해관계의 대립과 불확실성 때문이다.

예컨대 금융노련과 정부간의 갈등,의약분업과정에서 생긴 의·정(醫·政)갈등 등이 그것이다.

광복후 55년간 지속된 분단의 비극이 햇볕정책으로 녹아들어 화해와 협력의 장이 열리고 있는 데도 사회불안이 가시지 않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한 사회가 안정되려면 모든 부문에서의 균형적 발전이 긴요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민주적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효율을 지향하는 경제,정체성을 얻고자하는 문화 등 어느 하나도 불균형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특히 경제 등의 개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행정 부문이 사회 안정과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조정(平衡調整)역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무엇이 과연 역사발전의 원동력인지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한다.

그동안 역사발전을 보는 사관은 크게 유심사관(唯心史觀)과 유물사관(唯物史觀),즉 경제결정론(經濟決定論)으로 나뉜다.

아류도 많지만 큰 범주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사관으로 역사발전은 물론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까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 제시되었다.

앞의 두 사관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또는 별개의 독립사관인지를 명시할 수는 없다.

아직 검증된 정설로 정착되지는 않았으나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므로 소개한다.

''비영합론(非零合論)-인류숙명의 논리(Non-Zero - The Logic of Human Destiny)''(Pantheon Books,New York,2000)는 뉴 리퍼블릭,사이언스 등 잡지의 수석편집인이었던 라이트(Robert Wright)가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렵사회와 폴리네시안의 원시생활로부터 중세 이슬람의 상업 그리고 중국의 기술사까지를 섭렵하면서 발견한 인류학적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와 복잡한 창조과정 및 영장류의 발전과정 등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는 이러한 발전의 동력(impetus)이 서로간에 내재하는 경쟁의 정도와 그 경쟁이 궁극적으로 영합(零合·zero sum) 또는 비영합(非零合) 게임중 어디에 귀착되었는지에 달려 있었다고 설파한다.

물론 오늘날 세계화로 하나가 된 지구의 역사도 이 범주의 게임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영합(零合)게임은 일방이 이득을 얻으면 상대방은 반드시 같은 크기의 손해를 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이득이 없는(이득=0) 게임이다.

도박,강·절도,횡령,증뢰물 등이 대표적인 예다.

반대로 비영합(非零合) 게임은 일방이 얻는 이득의 크기가 다른 쪽의 손실규모보다 크거나 손실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게임을 말한다.

생산적이고 서로가 이기는(win-win) 게임이다.

분업,무역,기술혁신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협동이 이 범주에 속한다.

불행히도 지금 우리의 역사관은 너무 단견이다.

오늘의 고통(개혁)이 내일의 이득(도약)으로 보상된다는 안목 대신에 모두가 오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역사맹(歷史盲)이 돼버린 것 같다.

계층간 이해관계의 조화가 서로간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비영합게임 의식은 실종되고 모든 사회·경제·정치 관계가 오직 영합게임으로만 인식되는 것 같다.

개혁의 역사적 당위성은 인식하면서도 이해당사자간의 갈등을 정치·사회적으로 조정하는 데는 큰 무게가 실리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읽기는 힘들지만 저자의 시각이 참신하게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