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 노릇도 못하고 부모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해 미안하고 죄송할 뿐입니다”

4남1녀중 장남으로 지난 47년7월 월남했다가 발이 묶인 윤대호(71·서울 관악구 봉천6동)씨는 북한에 형제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기쁨과 함께 슬픔이 몰아쳐 말을 잇지 못했다.

윤씨는 이날 오전 대한적십자사로부터 북한에 남동생 태산(65) 금산(60) 도산(54)씨등 남동생 3명과 누나 신자(74)씨가 살아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북에 두고온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때부터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윤씨는 그러나 제사를 지낼때마다 부인 나윤열(68)씨의 몸이 아파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 영문을 물어보기도 했다.

윤씨는 “당시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며 혹시 부모님이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고향에 가면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먼저 물어보고 산소에 성묘하고 싶다”고 말했다.

윤씨는 17세때인 지난 47년 친한 친구와 함께 38선을 넘었다.

당시 고향인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 자산리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윤씨는 보다 좋은 여건속에서 공부하기 위해 월남을 결심했다.

윤씨는 당시 어머니가 “아직 어리니까 혼자 가지 말고 아버지가 데려다 줄때까지 기다리라고 만류했다”며 “어머니 몰래 빠져나왔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고 회고했다.

윤씨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교회장로를 맏고 있었고 윤씨 가족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윤씨는 이때문에 매년 크리스마스때만 되면 가족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기억에 더욱 가슴이 메었다고 말했다.

윤씨는 집을 나와 친구와 함께 장사꾼을 따라 어둠을 틈타 38선을 넘었다.

당시 남한땅이었던 개성에 도착,송도중학교에 다니다 중퇴하고 경찰학교에 들어가 경찰이 됐다.

그는 6·25전쟁이후 미8군에 들어가 용산과 문산기지등에서 목수로 일하다가 89년 정년퇴직했다.

현재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요진빌딩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다.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