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는 1971년에 나온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감독데뷔작이다.

인기DJ에 대한 여성팬의 스토킹을 다룬 이 영화는 흔해빠진 살인장면 하나 없이도 시종일관 보는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사랑을 거부하는 남자를 괴롭히는 여자의 치밀함과 집요함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섬뜩한 벨소리로 요약된다.

97년 국내에서 출간된 같은제목의 소설 또한 "따르릉"소리의 끔찍함을 소재로 하고 있다.

현직교사 김동민씨가 펴낸 이 작품은 얼굴없는 치한 "악의 호"와 싸우는 전화국 여직원의 모습을 통해 우리사회에 횡행하는 전화폭력의 실태를 고발한다.

전화폭력은 익명성을 무기로 저질러지는 무시무시한 범죄다.

음란성인 경우가 많지만 다짜고짜 욕을 하거나 협박 공갈을 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한밤중 아무 번호나 돌려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식이 많던 종래와 달리 근래엔 신문기사나 정책 판결 비평등에 대한 불만을 특정인이나 집단에 대한 집중적 전화공격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휴대폰이 일반화되면서 음성은 물론 문자서비스로 모욕을 주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한밤중이나 새벽의 벨소리는 내용에 관계없이 걱정이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물며 무심코 받은 전화에서 "죽여버리겠다""애들 어느학교 몇학년 몇반이지" 혹은 "외롭고 심심하지"식의 야비한 소리가 들리면 떨리다 못해 온몸이 얼어붙는다.

전화를 하곤 아무말없이 끊거나 가만히 있어도 소름끼치기는 마찬가지다.

한번의 수모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반복되면 자신과 상관없는 벨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거나 심한 경우 우울증이나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된다.

자동차와 함께 문명의 최대이기인 전화가 이처럼 심각한 부작용을 낳으면서 구미에선 발신자 정보표시(Calling Identity Dilivery,CID) 서비스가 일반화된지 오래다.

자동 전화번호 확인(Automatic Number Identification,ANI)기능에서 확장된 이 서비스는 87년 미국의 벨사가 상용화한 이래 세계 50여개국에서 사용된다.

국내에선 통신비밀보호법때문에 도입되지 않다가 85년부터 심사를 한 뒤 발신번호만 확인해줘왔다.

그러나 이 서비스를 받으려면 피해사실 입증자료를 제출해야 하는데다 일단 전화를 받아야 하는 불편함때문에 사실상 전화번호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는 가을부터는 국내에서도 전화를 받기 전에 건 사람의 번호를 확인할수 있는 발신번호 표시제가 실시되리라 한다.

발신자 인권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을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익명성이 줄어드는 만큼 상당부분 예방될수 있을 것이다.

들키는 게 무서워서 그만둘게 아니라 장난이나 순간적 화풀이로 한 짓이 피해자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는 분위기가 확산됐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