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신부터 혼란스럽습니다"

서울 삼성동의 H고교에서 윤리과목을 가르치는 윤모 교사는 난감하다는 투로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소감을 밝혔다.

"김일성 주석의 그늘에 가려진 폐쇄적인 이미지,내성적인 성격,광적인 영화광,건강위기설,지도자로서의 역량결여가 지금까지 강요받은 김정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하루 사이에 "위대한 지도자"로 바뀐 사실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은 공권력을 가진 법 집행기관도 마찬가지였다.

남북 정상이 만난 13일 전국 10여개 대학 구내에서 북한 인공기가 태극기와 나란히 걸렸다.

검찰은 부랴부랴 현행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에 위반되는 명백한 범법행위라며 주동자를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정치인의 선거공약같은 것 아니겠느냐는 반응이다.

경찰도 학교측에 철거요청을 했지만 정상회담 분위기를 고려해 강제철거는 하지 않을 방침이라는 태도로 법과 현실의 딜레마를 피해갔다.

이러한 혼란은 사회적 합의없이 다소 돌출적으로 이뤄진 남북정상회담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만남도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는 북한경제 현실을 북한정부가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남쪽에서는 광고를 하면 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실리만 추구하면 됩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짤막한 언급은 이러한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이 국민의 정부의 외교통일분야 성적표를 위해 왜곡되서는 안된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들린다.

지금까지 남북관계를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해온 "업보"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북측이 정상회담을 수용한 만큼 이제 공은 다시 한국으로 넘어왔다.

한국의 유연성이 북한의 요구를 어느 수준까지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해야 할 시점이다.

"청사진과 장밋빛 전망에 도취할 일이 아니라 좀더 냉철함을 갖고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인식한 바탕위에 현실적 대안을 준비해야 합니다"

10년 넘게 대북사업을 담당해온 한 기업관계자의 지적처럼 당장 북한의 경제주권과 한국의 현실적 전략 간의 접목점을 어디에서 설정할 것인가부터 차근차근 풀어가야 할 때다.

이심기 산업부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