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초반,학생들은 수학여행을 금강산으로 가는 것이 그다지 별난일은 아니었다.

철원~금화간 금강산 전기철도는 이미 1924년 개통됐다.

1931년에는 연장 구간인 금강구~내금강(온정리)간의 공사가 마무리돼 철원에서 갈라져 온정리까지 가는 금강산선이 생겼다.

서울 용산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달리다가 철원에서 갈아타기만 하면 내금강 온정리에 닿았다.

한국철도동우회의 함성헌씨가 최근 일본에서 입수해 공개한 "조선열차시각표"(1944년12월 발행)에 따르면 금강산선 1백16.6km 구간에는 28개나 되는 역이 있었다.

매일 오전 6시30분 첫차부터 오후 5시10분 막차까지 하루 7차례씩 운행했다.

철원~내금강까지 4시간쯤 걸렸고 요금은 6원이었는데 쌀값으로 계산하면 요즘 돈으로 3만8천원이나 되는 셈이라고 한다.

당시 서민으로는 큰 돈이다.

옛 금강산선은 광복을 전후해 운행이 전면 중단된 후 철로까지 완전히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대신 97년 4월 총연장 1백1.5km에 이르는 원산~금강산 간 단선철도가 개통됐다.

현대가 남한의 강원도 간성에서 금강산 온정리를 잇는 30여km의 1차선 신 금강산 철도를 추진중이라고 한다.

남북정상회담에서도 토의될 예정이라니 그 결과가 기다려진다.

금강산 철도가 놓이면 당일 왕래가 가능해지고 관광여행비도 훨씬 더 적게 들어 유람선보다 많은 관광객이 몰릴 것은 분명한 일이다.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죽기전에 한 번은 금강산에 올라야 한다"는 전해오는 말이 있다.

선인들은 부채나 병풍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즐겨 그렸다.

금강산은 그만큼 우리의 의식과 생활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산이다.

가본 사람이나 가보지 못한 사람이나 한없는 외경과 동경을 품고사는 민족의 영산이다.

그동안 유람선을 타고 금강산 관광을 한 사람이 25만명에 이른다지만 그것조차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분단 이전처럼 남한의 학생들이 새 금강산 철도를 타고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갈 날도 멀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