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현대그룹 특정인사에 대해 물러가라고 주문한 적도 없고 특정 회사를 팔라고 한 적도 없다. 다만 시장에서 납득할만한 수준이 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용근 금융감독위원장이 29일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쉽게 말해 이익치 현대증권회장 등 금융계열사의 경영진 퇴진과 우량계열사의 매각을 정부가 요구한 적이 없다는 얘기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시장 참가자들은 "기대반 우려반"의 반응을 보였다.

금융시장을 꼬이게 한 현대 사태가 정부의 "양보"로 해결가닥을 잡았다는 신호로 해석됐기 때문에 환영한다는 의견이었다.

반면 정부가 그토록 소리높여 주장하던 현대그룹의 지배구조개선과 우량계열사 매각을 거둬들인다는 사인이기도 해 "정부의 신뢰감"에 대한 우려도 상당했다.

실제가 그랬다.

현대사태가 불거진 지난 26일 이후 정부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현대의 지배구조개선을 외치고 나왔다.

일부 당국자들은 이익치 현대증권회장의 퇴진을 현대사태 해결의 전제조건으로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사태의 원인이 기본적으로 현대에 있는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얘기되는 구시대적인 "황제경영"행태 등이 수정돼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이용근 위원장의 말을 빌리면 "신뢰의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현대그룹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번 현대사태를 활용,시장을 무대로 그동안의 구원을 한꺼번에 씻으려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 이례적으로 정몽헌 현대그룹회장의 외환은행장 방문장면이 공개돼 현대그룹은 신인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금융시장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건 물론이다.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 고위관계자들의 이익치 회장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해 차제에 이 회장을 "아웃"시키려 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이런 의도를 공개적으로 관철하려다 시장이 불안해지자 슬그머니 발을 뺐다는 해석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

최근 시중의 화두는 "신뢰의 위기"다.

386정치인들의 술자리며,시민단체 핵심인사와 국책연구기관장의 성추문 논란 등.

사회 지도층의 신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건이 꼬리를 잇고 있다.

이런 판국에 정부마저 시장을 상대로 흥정을 하려다 스스로 "신뢰의 위기"를 초래한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다.

하영춘 증권1부 기자 hayoung@ 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