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남북회담과 이데올로기 .. 김우창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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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희망적인 일 중 하나는 얼마 후 있을 남북정상회담이다.
그러나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통일이나 화해에의 길을 구체적 단계로 풀어서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무슨 방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당위의 역설이 아니라 구체적 방안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알기 어려운 것이 바로 구체적 방안이다.
다른 권력체제로 구성돼 있는 두 정치 단위가 하나로 합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이러한 권력의 성격,특히 국가권력의 성격에서 오는 이유 외에도 남북문제에는 많은 어려움의 요인들이 개재돼 있다.
그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 남한은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갖고 있고 이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어느 사회나 이데올로기가 없는 곳은 없다.
사람이 이루는 집단은 집단으로 존속하는 또는 존속해야 하는 이유들을 갖고 있다.
역사는 민족이나 국가가 존속하는데에 중요한 이념적 기초로 작용한다.
이 역사란 경험의 공유를 말하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공통된 언어 문화 생활 등의 지속성도 물론 집단의 중요한 존재 근거다.
이외에도 사람들은 보다 일반적인 정당성의 믿음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생활의 실제가 반드시 엄격하게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전반적으로 정의로운 원칙에 입각한 사회라고 믿을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진 사회라고 해서 사람들의 삶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마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슬람 국가와 같은 원리주의적 종교 및 도덕과 윤리에 입각한 사회가 가장 행복한 사회일 것이다.
엄격한 공산주의에 입각한 사회도 행복한 사회여야 한다.
정당성에 관계없이 물질적인 의미에서 행복한 상태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당성 없는 곳에 행복한 삶이 있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곳에서는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삶의 조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사회적 삶,필요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조직화한다.
이데올로기의 특성은 경직성이다.
어떤 경우에나 정당성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그것은 많은 문제에 대한 유연한 접근을 어렵게 한다.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의 역사적 근원은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라 우리 특유의 명분주의적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명분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자주 우리로 하여금 사람사는 구체적인 현실을 잊어버리게 한다.
명분이 궁극적으로 정당성의 실제에 대한 요구라면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이 추상적 이념으로 표현돼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 작은 생활의 관습과 느낌으로 막연하게 존재하는 경우다.
지나치게 정의가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생활의 실제에서 무너져 간다는 징후다.
가장 기초적이면서 단순한 정당성은 정의다.
말할 것도 없이 정의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이념이요 가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이 필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같이 산다는 것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는 부도덕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까지도 포함해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한다.
공존은 정의보다는 더 기본적인 삶의 현실에서 나온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먹고사는 일을 포함해 매우 구체적인 일이다.
남북의 상봉에 있어서도 서로 협동할 수 있는 일이 이러한 구체적인 것들에서 찾아질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남북회담 이전에 이미 얘기 된 바 있는 나무심기,식량 나누기 등은 공동 노력의 적절한 대상일 것이고 여러 사회 하부구조의 시설,비교적 현실과 관련이 없는 학문적 연구 등도 이러한 공동 노력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일들은 구체적인 일들이다.
통일에 관해 그 어려움을 지나치게 강하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선입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물론 통일에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니다.
열렬한 민족의 이념과 감정으로 단번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빠지는 것이 된다.
필요한 일은 정열을 가슴깊이 감추고 그 생각을 구체적인 작은 일들로 쉼없이 번역해내는 일이다.
남북의 수뇌가 만나는 것은 잘된 일이다.
수뇌가 아니라도 만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의 일은 큰 것으로부터 시작해 작은 것으로 나아가는 수도 있지만 작은 만남과 사귐으로부터 큰 결과로 나아가는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경계하는 것은 이러한 작은 길을 시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통일이나 화해에의 길을 구체적 단계로 풀어서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무슨 방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당위의 역설이 아니라 구체적 방안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알기 어려운 것이 바로 구체적 방안이다.
다른 권력체제로 구성돼 있는 두 정치 단위가 하나로 합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이러한 권력의 성격,특히 국가권력의 성격에서 오는 이유 외에도 남북문제에는 많은 어려움의 요인들이 개재돼 있다.
그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 남한은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갖고 있고 이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어느 사회나 이데올로기가 없는 곳은 없다.
사람이 이루는 집단은 집단으로 존속하는 또는 존속해야 하는 이유들을 갖고 있다.
역사는 민족이나 국가가 존속하는데에 중요한 이념적 기초로 작용한다.
이 역사란 경험의 공유를 말하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공통된 언어 문화 생활 등의 지속성도 물론 집단의 중요한 존재 근거다.
이외에도 사람들은 보다 일반적인 정당성의 믿음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생활의 실제가 반드시 엄격하게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전반적으로 정의로운 원칙에 입각한 사회라고 믿을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진 사회라고 해서 사람들의 삶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마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슬람 국가와 같은 원리주의적 종교 및 도덕과 윤리에 입각한 사회가 가장 행복한 사회일 것이다.
엄격한 공산주의에 입각한 사회도 행복한 사회여야 한다.
정당성에 관계없이 물질적인 의미에서 행복한 상태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당성 없는 곳에 행복한 삶이 있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곳에서는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삶의 조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사회적 삶,필요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조직화한다.
이데올로기의 특성은 경직성이다.
어떤 경우에나 정당성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그것은 많은 문제에 대한 유연한 접근을 어렵게 한다.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의 역사적 근원은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라 우리 특유의 명분주의적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명분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자주 우리로 하여금 사람사는 구체적인 현실을 잊어버리게 한다.
명분이 궁극적으로 정당성의 실제에 대한 요구라면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이 추상적 이념으로 표현돼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 작은 생활의 관습과 느낌으로 막연하게 존재하는 경우다.
지나치게 정의가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생활의 실제에서 무너져 간다는 징후다.
가장 기초적이면서 단순한 정당성은 정의다.
말할 것도 없이 정의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이념이요 가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이 필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같이 산다는 것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는 부도덕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까지도 포함해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한다.
공존은 정의보다는 더 기본적인 삶의 현실에서 나온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먹고사는 일을 포함해 매우 구체적인 일이다.
남북의 상봉에 있어서도 서로 협동할 수 있는 일이 이러한 구체적인 것들에서 찾아질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남북회담 이전에 이미 얘기 된 바 있는 나무심기,식량 나누기 등은 공동 노력의 적절한 대상일 것이고 여러 사회 하부구조의 시설,비교적 현실과 관련이 없는 학문적 연구 등도 이러한 공동 노력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일들은 구체적인 일들이다.
통일에 관해 그 어려움을 지나치게 강하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선입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물론 통일에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니다.
열렬한 민족의 이념과 감정으로 단번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빠지는 것이 된다.
필요한 일은 정열을 가슴깊이 감추고 그 생각을 구체적인 작은 일들로 쉼없이 번역해내는 일이다.
남북의 수뇌가 만나는 것은 잘된 일이다.
수뇌가 아니라도 만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의 일은 큰 것으로부터 시작해 작은 것으로 나아가는 수도 있지만 작은 만남과 사귐으로부터 큰 결과로 나아가는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경계하는 것은 이러한 작은 길을 시험하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