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TV 골프중계로 방송사들과 미 PGA가 많은 돈을 벌자 투어
프로선수들은 이익금은 당연히 선수들 것이라며 분쟁을 일으켰다.

쇼는 선수들이 하고 돈은 엉뚱한 사람이 챙긴다는 것.

급기야 1967년 덴버에서 열린 PGA 챔피언십 대회를 1주일 남겨놓고 선수들의
투어 보이콧 운동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1968년 잭 니클로스 등 주요선수들이 주동이 되어 PGA의
수익 등을 관장하는 별도의 기구인 토너먼트 플레이어스 PGA 디비전을
세운다.

초대 커미셔너는 조셉 디가 1974년까지 맡았다.

두번째 커미셔너 딘 비먼은 20년 넘게 운영하게 된다.

그는 1백만달러도 안되던 PGA투어의 재산을 2억5천만달러가 되게 불렸다.

수입 또한 3억달러를 넘게 만들었다.

PGA투어 커미셔너로서 독재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나 미 골프역사는 그를
훌륭한 경영인으로 칭하고 있다.

오늘날 골프라 하면 아마추어및 프로 등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로
되어있다.

그러나 1961년까지 흑인들에게는 금지사항이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남부쪽에서 개최되는 마스터스는 1975년에야 흑인 선수들
을 참가시켰다.

1961년 마스터스 대회에 외국인으론 처음 우승한 게리 플레이어(1935~)란
선수가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난 그는 15세때 아버지의
집요한 설득(그는 골프는 여자같은 사내들이나 하는 게임으로 믿고 있었다)
으로 골프장에 따라갔다.

그런데 생애 첫 라운드에서 첫 3홀을 연속 파로 장식하는 경이로운 일이
생긴다.

그는 바로 골프광이 돼 1년반 후에는 "스크래치 골퍼"가 되고 18세 나이에
프로의 길로 향한다.

2년후 영국으로 건너가 첫 우승을 타국에서 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가 향후
40년간 9백만마일을 여행하며 타이틀 획득 사냥에 나서는 전기점이 된다.

1959년 첫 메이저 타이틀인 브리티시오픈에서는 2라운드 후 8타차로
뒤지고 있었으나 이를 뒤집고 2타차로 승리하게 된다.

1962년 미 PGA 챔피언십 우승, 1965년 US오픈 우승으로 인해 1920년 테드
레이가 US오픈을 우승한 이후 처음으로 US오픈및 마스터스 PGA챔피언십을
석권하는 첫 외국선수가 된다.

그리고 그는 역사상 현대의 그랜드슬램을 획득한 3인(진 사라센, 벤 호건)중
한사람이 되는 영예를 얻는다(그후 니클로스의 합류로 이 기록의 영예는 4명
이 된다).

1965년에는 월드 매치플레이를 5회나 우승하는데 이중에는 니클로스를 두번
이나 결승에서 이겼다.

1968년 브리티시오픈때도 니클로스를 2타차로 누르는 등 당대 최고 상승세를
타던 니클로스의 발목을 잡곤 했다.

모든 챔피언이 그러했지만 플레이어 역시 어떠한 역경에 닥쳐도 결코
포기하는 일이 없는 골퍼로 알려져 있다.

1974년 마스터스와 브리티시오픈 우승은 연극같은 게임이었다.

그해 말 브라질오픈에서는 골프내셔널챔피언십 대회사상 처음으로 59타란
기록을 경신한다.

생애 1백20개가 넘는 대회를 세계적으로 석권한 그는 거리감각이 뛰어났으며
퍼팅 또한 일품이었지만 샌드플레이는 골프 역사상 그를 따르는 선수가
없었다.

만 50세가 되던 1985년 미 시니어 PGA투어에 참여해 모든 시니어 메이저
대회를 석권한 그는 현재 남아프리카의 목장에서 거의 은퇴한 상태로 불우한
사람과 골프꿈나무육성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전 미 PGA 티칭프로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