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리콘밸리의 산학복합군단 ]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101번 도로를 타면 남쪽으로 접어들자마자 길 양쪽
으로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얼핏보면 창고인지 공장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건물들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주력단지다.

처음 반도체 원료인 규소(실리콘)에서 이름붙여진 이곳은 지금 세계
정보통신산업과 인터넷 비즈니스의 "메카"로 더 빛을 뿜고 있다.

본래 실리콘밸리는 팰러앨토에서 새너제이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켰다.

그러나 최근에는 샌프란시스코 남단까지 뻗어가면서 그 영역을 계속 넓혀
가고 있는 중이다.

실리콘밸리는 기술과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맨주먹으로도 일확천금의
현대판 "골드 드림"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그 "골드 러시"의 꿈을 좇아 지금 너도 나도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
이다.

미국 벤처자본의 40%는 실리콘밸리에 둥지를 튼채 투자대상을 찾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하이테크 분야의 세계 1백대 기업중 20여개사가 몰려 있다.

인텔 시스코시스템즈 선마이크로시스템즈 등 세계 정보통신 산업을 호령
하는 기업들의 연구개발(R&D) 거점도 여기 있다.

실리콘밸리가 이처럼 세계 첨단 기업들을 한곳에 끌어 모으고 있는 힘은
무엇일까.

이곳의 인터넷업체 킬러비즈사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 이계복사장은
"실리콘밸리의 진정한 힘은 변화를 주도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한다.

실리콘밸리는 언제나 가장 먼저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창출, 미국은
물론 전세계 기업과 소비자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데 앞장시킨다.

기술과 비즈니스 혁신의 발원지(발원지)가 바로 실리콘밸리라는 것이다.

세계가 실리콘밸리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모든 기업이 이곳과 직.간접적
연결고리를 가지려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 원동력은 실리콘밸리의 대학과 연구소 기업이 이뤄내는 독특한 결합방식
에서 나온다.

"실리콘밸리의 대학과 연구소는 모두 기술과 지식을 파는 기업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실리콘밸리 최대의 기업은 인텔도 시스코도 아닌 스탠퍼드대학
이다. 실리콘밸리는 그 자체가 거대한 산.학.연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캐시 카스틸로 스탠퍼드대 대외협력실장의 설명이다.

사실 실리콘밸리의 역사는 스탠퍼드대학에서부터 비롯된다.

스탠퍼드가 위치한 팰러앨토는 지난 1939년 휴렛 팩커드(HP)가 공장을 처음
세운 곳이다.

이곳에서 남쪽 25km 거리에 있는 새너제이까지 스탠퍼드 출신들이 세운
기업은 선마이크로 야후 시스코 등 5백여개사에 달한다.

실리콘밸리를 하이테크 벤처의 요람으로 가꿔온 스탠퍼드의 전통은 요즘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1백20여명 가운데 벌써 50여명이
창업했다"고 카스틸로씨는 전한다.

스탠퍼드의 모든 교수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지역 기업과 관련을 맺고
있다.

경영학 교수라면 경영 상담을 해주고 공대 교수라면 기술을 제공한다.

자신의 회사를 갖고 있는 교수와 학생도 많다.

이곳의 기업들 역시 교수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스탠퍼드는 스스로의 위상을 "기술이라는 자본을 가진 거대 기업"
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난 1970년 기업들에 기술을 이전하고 연구와 교육에 드는 비용을 충당
하기 위해 기술이전센터(OTL)를 만든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이곳에서는 스탠퍼드의 교수나 학생이 개발한 발명 특허 물질등록을 대행해
주고 트레이드 마크 등을 관장한다.

이곳에서 공개된 기술은 지금까지 3천5백개에 달한다.

이중 10~15% 정도는 기업으로부터 로열티를 받고 있다.

1996년에만 2백72개의 기술에 대해 5천1백80만달러를 로열티 수입으로
챙겼다.

이 대학의 각 연구소에는 최소한 3백여 기업이 정기적으로 기금을 내고
있다.

최근에는 찰스 슈왑, 제너럴 애틀랜틱 파트너, 이베이 등이 2천만달러(약
2백20억원)를 출연해 대학 안에 전자상거래연구센터를 짓기로 했다.

후버연구소의 로버트 마이어즈 한국담당 연구위원은 "최근 미국 전역에서
제2의 실리콘밸리를 표방하는 하이테크 단지들이 잇따라 조성되고 있지만
그들과 실리콘밸리가 다른 결정적인 차이가 한가지 있다"며 "실리콘밸리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대한 연구대학이 중심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
이라고 지적했다.

스탠퍼드대학과 같은 실용적인 연구풍토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7백여개의
연구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1970년대에 기초연구에 몰두했던 루슨트테크놀로지 등 대기업 연구소들
은 응용분야로 아예 방향을 틀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연구소 가운데 하나인 SRI도 마찬가지다.

지난 1946년 스탠퍼드대 교수들이 설립한 SRI 연구소는 1960년대에는 국방
에너지 보건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거둬 한때 "기술의 후버연구소"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 연구소는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졌던 1980년대 후반부터 민간
기업의 자금지원이 상당 부분 끊어진데다 동구권의 몰락으로 국방 프로젝트
마저 줄어들어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이때 취임한 폴 쿡 회장은 "SRI가 가진 모든 기술의 상품화"를 선언했다.

이때부터 SRI는 연구팀에서 개발한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업화했다.

성공가능성이 있으면 바로 분사해서 독립시켰다.

기업의 경영진은 외부에서 영입해 분사후에도 연구개발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줬다.

또 기술이 팔리면 로열티 수입의 3분의 1은 개발자의 몫으로 줘 연구 의욕을
북돋았다.

지난 1996년 이후 SRI에서 분사한 회사는 30여개.

SRI가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4억달러나 된다.

SRI가 시련을 딛고 도약할 수 있었던 최대의 비결은 "시장"에 먹히는 기술
을 개발해온 덕분이라는 것이다.

지금 전세계 모든 컴퓨터에서 사용되고 있는 마우스도 이 연구소가 개발해
낸 것이다.

이런 경향은 이 지역 터줏대감인 HP 연구소도 마찬가지다.

HP연구소의 딕 램프먼 부소장은 "HP 연구소가 다른 곳과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은 연구성공률이 높고 개발된 기술을 누구보다 빨리 상품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술을 신속하게 상품화하는 것은 인터넷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핵심
전략"이라고 덧붙였다.

산.학.연이 한몸이 되어 시장의 입장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그것을 바로
상품화하는 것.

그것이 실리콘밸리 최고의 힘이라는 얘기다.

< 실리콘밸리=이학영.김태완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