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새 천년의 첫 국회의원 선거 개표를 보고 있다.

물론 꿈속에서.

방송 3사의 생방송 화면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청색과 황색과 녹색이 국토를 두부모 자르듯 나누었던 낯익은 그림이
사라졌다.

한나라당의 전반적인 강세에도 불구하고 대구 경북 지역 곳곳에서 민주신당
과 자민련 후보들이 당선을 확정지었고, 부산과 경남 동해안의 일부 선거구
에서는 차기 대권도전을 선언한 민주신당의 중진의원과 민주노동당 후보들이
예상을 뒤엎는 압승을 거두었다.

광주광역시와 전북 전주시 일대에서는 의석의 절반을 무소속 후보들이
차지했고, 광양시를 비롯한 전남 동부 지역과 전북 북부 지역에서는
한나라당과 무소속 후보들이 민주신당 후보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중이다.

자민련은 철옹성이라던 충남에서 겨우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고,
대전과 충북에서는 민주신당과 한나라당이 내세운 무명의 신인들이 자민련의
중진들을 여유있게 앞서 나가고 있다.

여당의 전통적 강세지역인 강원도와 경기 북부에서는 여야 3당이 호각세를
유지했고 제주도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모두 승리했다.

돌풍과 이변은 총선의 승부처인 서울과 인천, 경기 남부에서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우선 여야를 막론하고 4선 이상의 부총재급 중진들이 거의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곳에 출마한 10명의 여성후보는 전원 당선이 확정되었거나 선두를 달리는
중이며 민주노동당은 부산과 경남에 이어 수도권 근로자 밀집 지역 세 곳에서
도 당선자를 내는 기염을 토했다.

한편 자천타천으로 차기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른 여야의 50대 정치인들은
각각 50%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전체적으로 공동여당은 일부 지역에서 연합공천을 하는 등 끝까지 공조를
유지했지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원내 유일야당이었던 한나라당도 무려 20개가 넘는 의석을 잃었다.

전례없는 강세를 보인 무소속이 전국에서 고르게 약 30명의 당선자를 냈고
신생 민주노동당도 10여석을 확보함으로써 일단 생존의 거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국회의원의 연령은 15대 국회보다 평균 10살이 넘게 낮아졌고 비례대표를
포함한 여성 국회의원 수는 역사상 처음으로 20명을 넘어섰다.

대통령이 여당 후보들을 향해 손톱만큼의 부정행위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가운데 선관위가 1백여 시민단체와 손잡고 감시운동을 벌인
새 천년 첫 선거에 대해 여야는 역사상 가장 깨끗한 선거였다는 성명을 냈고
지역감정 선동과 흑색선전 혐의로 선관위의 경고를 받거나 고발을 당한 후보
들은 전원 낙선했기 때문에 선거 후유증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여야 대변인과 사무총장들이 모두 선거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발표한 가운데 민주노동당은 무소속 당선자들과 함께 무소속협의회
형식의 별도 교섭단체를 만들겠다고 밝혔고 일부 무소속 당선자들이 여기에
호응하고 나섰다.

어떤 정치평론가는 이 선거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로써 민주신당/자민련의 지역연합과 한나라당이 양극을 형성했던
지역주의 정치구도는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되었고, 지금까지 여야 각 당에
뒤섞여 있던 다양한 성향의 정치인들이 다음 대통령 선거를 겨냥하고 노선과
정책을 중심으로 새로운 합종연횡을 형성할 경우 30년 넘게 지속되어온
"3김시대"는 자연스럽게 그 수명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새 천년의 첫 새벽부터 이런 "황당한" 꿈을 꾸는 건 분명 직업병이다.

하지만 어떤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면 없던 길이 생기는 것처럼 허황한 꿈도 모두가 함께
꾸면 현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