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넴초프 < 전 러시아 부총리 >

지난 19일 치러진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선거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지지하는 친정부계 정당 "단합당"이 급부상했다.

이는 러시아 정치 시스템에 매우 긍정적인 신호로 보인다.

비록 공산당이 득표수에서는 1위를 차지했지만 이는 공산당의 퇴조라는
기류를 그대로 반영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은 영향력을 잃고 개혁주의자들이 힘을 얻게
됐다.

개혁주의자들이 국민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러시아 정부도 그동안 추진해
왔던 경제개혁 조치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혹자는 러시아의 하원이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고 묻는다.

지난 8년간 러시아와 서방 언론들은 하원이 힘없는 "바보 멍청이"들의
집합체라고 비아냥대왔다.

사실 러시아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하원은 때론 서커스장으로, 또는 스피드
범퍼차 놀이장으로 여겨져 왔던 게 사실이다.

특히 지난 93년10월엔 탱크의 사격 표지판으로도 사용되지 않았는가.

두마를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두마가 변화할 계기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91년 이후 두마는 러시아 정부의 모든 개혁작업에 제동을 걸어오기만
했다.

하원이 가진 거부권은 러시아 경제를 회생시키려는 모든 개혁주의자들의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그 힘은 개혁주의자들과 러시아 정부를 거세하는 효과를 낳아왔던 게
사실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공산당의 지지자들은 탈 냉전후 정국혼란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연금생활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정부가 보조금을 줄이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인구통계학적으로 보면 공산당 지지자들의 영향력이란 세월이 지나며
자연스레 줄어들게 돼있다.

이번 선거는 러시아에서 공산당이 다수표를 얻은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이번 개혁주의자들의 승리는 탈공산주의 이후 러시아의 장래를 결정짓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확실하고 조용하게 러시아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중산층, 즉 중소규모의 기업을 갖고 있는 계층들은 러시아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번 선거로 "정책방해꾼"이라는 두마의 이미지는 서서히 변화해 나갈
것이다.

정부와 협력 관계속에서 국민들이 원하는 법안들을 만들어 나가게 될
것이다.

이런 변화로 인해 러시아엔 "시장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법적 틀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재산권" 분야에서는 국민들의 권리가 크게 개선될 것이다.

기업가들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데 이전처럼 고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사업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두마가 보여준 "고질적인 분열상"도 이번 선거를 통해 점차 치유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단합당 같은 중도우파의 승리는 "민주정치란 하나를 더하는
것이지 하나를 감소시키는 데 있지 않다"는 진리를 국민에게 일깨워 주었다.

정당정치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푸틴 총리가 지지하는 단합당이 앞으로 그런 러시아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아직은 단언하기 힘들다.

푸틴 총리 개인에 대한 검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3개월 전만해도 그는 러시아 정계에서 매우 낯선 인물이었다.

그때는 단합당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19일 선거에서 국민들이 단합당에 표를 던진 것은 어쩌면
푸틴 개인보다는 체첸 전쟁에 대한 찬성표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란 국민들에게 공통의 "적"으로 간주된 대상에 대해 국민을
단합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이런 전통의 특성이 이번 선거에서 효과를 나타냈고 러시아가 체첸을
이기고 있는 한 그런 부수효과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는 푸틴 총리와 단합당에 확실한 정치적 기반을 제공했다.

또 내년 6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 러시아 정국에도 이정표가 될만한 결과를
만들었다.

사실 러시아 정부는 몇달 전만해도 인기도 면에서 매우 걱정스런
상황이었지만 이번 선거에서 확실히 이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의할 점이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정서는 매우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현 모스크바 시장인 유리 루츠코프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 연합팀이
크렘린의 지휘 하에 있는 러시아 언론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아 패했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대선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이번 선거결과는 많은 문제로 고통받는 러시아 국민들
에게 희소식이다.

러시아 국민들은 공산당 독재라는 과거로의 회귀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공산당에 점점 더 많은 반대표를 던지고 있다.

그들은 현재의 경제적 안정이 지속되길 원한다.

그것을 현 정부가 직시해야 할 것이다.

[ LA타임스 신디케이트 = 한국경제신문 독점전재 ]

< 정리=박수진 기자 parksj@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