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지구에 종말이 올 것이란 예언은 틀린 것일까.

"종말"을 경천동지할 대재앙으로 해석한다면 "1999년 종말론"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러나 종말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아직도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경고에 인류가 노력으로 화답했고 이때문에 종말의 시기가
연기됐다고 한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99년 7의달"도 7월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말을
바꾼다.

물론 "종말"을 전쟁과 환경파괴, 도덕의 타락 등으로 본다면 이미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긴 하다.

또 종말을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을 넘어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고 보면 그 뉘앙스는 달라진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한 해석과 시한부 종말론 주장의 문제점을
짚어보면서 "인류 종말"의 참뜻을 되새겨보자.

세기의 예언가였던 노스트라다무스는 "모든 세기"란 책에서 1999년에 벌어질
사건에 대해 비유적으로 예언했다.

"1999년 7의달/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앙골모와의 대왕을
부활시키기 위해/그 즈음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리라".

태음력으로 7월이니 오늘날의 태양력으로 바꾸면 8월이 된다.

많은 해석가들은 "공포의 대왕"을 혜성으로 풀이했다.

8월말께 지구와 혜성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얘기였다.

헐리우드 영화자본이 같은 스토리의 "딥임팩트"와 "아마겟돈"을 만들 정도로
이 주장은 사람들을 공포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스트라다무스 연구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일본의 고토 벤씨는
"일부 현명한 인간들의 노력으로 인류 생존이 연장됐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위기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공포의 대왕은 언제든 하늘에서 내려올 수 있다"며 살짝 비켜간다.

"7의 달"도 7월을 뜻하는 게 아니라 노아가 대홍수속에서 구원받은 "제7의
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파멸의 위기에 다다른 인류에 경종을 울리고 반성하게 만든 것은
자신들의 공이라고 추켜세운다.

제임스 플레이너건 같은 "책임있는" 해석가들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3천7백여년까지 이어진다"며 인류 종말에 대한 과장된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내세운 시한부 종말론도 1999년이 아무 일없이
지나가면서 그 주장의 허황됨이 밝혀졌다.

지난 92년 예수 그리스도가 공중재림하고 7년간의 대환란을 거친 뒤 99년
예수가 지상재림한다는 다미선교회의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예수가 재림의 날짜를 연기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과 마태복음 24장, 다니엘서 2장 등을 너무 액면 그대로
해석한 탓이라고 기독교계는 비판한다.

기독교에서는 7이란 숫자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예수를 보내기까지의 구약시대가 대략 4천년,
예수가 재림하는 데 2천년, 여기에 천년왕국이 보태지면 7천년이 된다.

그래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1999년에 예수가 재림하고 종말이 온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정웅모 신부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삶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종말론에 빠져들었다"며 "교회와 사회 전체가 이들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천주교는 요즘 "종말"이란 말 대신 "완세"란 표현을 자주 쓴다.

세상이 불의와 죄악에 물든다고 해도 하나님은 인간을 절망속에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의가 넘쳐흐르는 완성된 세상으로 이끈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정 신부는 "하나님에 의한 종말이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 자초하는 종말에
대해서는 경종을 울려야 할때"라고 덧붙였다.

< 장규호 기자 seinit@ 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