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는 "개방된 시장"과 "공정한 경쟁"으로 요약되곤 했다.

민주주의가 만개한 미국에서는 다원화된 이익들이 집단의 형태로 경쟁하고
개진된 요구들은 합리적 결정과정을 거쳐 정책으로 자리잡는다고 여겨지곤
했다.

얼핏보면 미국같은 투명한 나라에서는 기업경영에 혈연 지연 등 인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이 최근 보도한 사례를 보면 기업 경영에서
인맥이 중요한 것은 미국이라고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퍼스트마크 커뮤니케이션스 인터내셔널은 아주 생소한 회사다.

이름만 들어서는 그저 "발에 치이는" 정보통신회사 중 하나에 불과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설립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퍼스트마크의 이사진은 너무도 쟁쟁하다.

헨리 키신저(전 국무장관), 나단 미르볼드(마이크로소프트 최고기술책임자),
버트 로버츠(MCI월드컴 회장), 버논 조던(워싱턴 정치브로커) 등이 퍼스트
마크의 이사진을 구성하고 있다.

화려한 이사진은 회사가 "뒷심"이 강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뭔가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안팎으로 힘을 쓰는 것이 이사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퍼스트마크의 이사진이 어떻게 해서 연결됐을까 하는 호기심을
품게 된다.

그것은 설립자인 린 포레스터(45)라는 여성의 개인적인 역량 덕분이다.

그녀는 미국의 정.재계를 누비는 "마당발"이다.

민주당 후원자모임의 실력자, 클린턴의 친구, 힐러리 클린턴의 상원의원
출마 후원단체장, 유력 투자회사인 로스차일드사 에버린 회장의 여자친구
등 그녀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에는 중량감이 느껴진다.

그녀는 또 메트로미디어의 전설적 경영자인 존 클루즈 회장에게 사업
노하우를 배웠다.

수많은 지인들의 성원에 힘입어 그녀는 무선통신분야에서 두 차례나 사업을
성공시켰다.

이를 통해 자산은 1억달러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녀에게 퍼스트마크는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새로운 시도다.

화상.음성정보와 인터넷서비스를 무선으로 연결하는 사업을 벌이는 그녀는
이미 벤처자금을 끌어들였으며 전략적 파트너도 찾았다.

풍부한 인맥을 가진 그녀에게 이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다.

유력 정치인과 기업 경영자들을 동원, 유럽지역을 연결하는 사업권을
따내기도 했다.

"벤처와 인맥"

자칫 상극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두 단어는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들이
발흥할 때부터 잘 어울리는 관계였다.

하이테크 기업들간에 인수.합병이나 제휴 출자가 복잡하게 진행되면서
벤처기업계에 인맥의 계열화가 나타났다.

일정 시일이 지나 수성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면 벤처기업에는 "인맥=사업
기회"가 된다.

전문가들은 실리콘밸리에서 본격적인 기업 도태가 나타날수록 이같은 인맥
중시 경향은 한결 강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해마다 열리는 "PC포럼"은 벤처기업가들이 새로운 투자
대상을 찾는 대표적인 장소로 떠올랐다.

지난 3월에 열린 포럼이 22회째였지만 얼마전까지 PC포럼은 벤처기업가들의
친목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포럼의 성격은 "내편을 찾는 자리"로 변모했다.

이번 포럼의 참가자는 인텔 선마이크로시스템스 아마존 등 어느 정도
정상의 위치를 확보한 기업의 경영진을 포함, 6백70여명에 달했다.

포럼의 주최자인 에스터 다이슨씨는 "제품구입과 같은 상담은 너무 구태
의연하다"면서 "투자나 제휴상대를 찾는 기회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인텔은 이미 한해 1백여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실리콘밸리 최대투자회사"
로 불린다.

그 1백여개 업체를 결정하는데 인맥 이상의 결정적인 요인은 없다.

아마존의 제프리 베조스 회장도 실리콘밸리에서는 단순한 벤처기업가가
아니라 "뛰어난 후각을 가진 투자자"로서 명성이 높다.

PC포럼이 한자리에 모여 인맥을 넓히는 형태인데 비해 전문적으로 제휴처를
찾아주는 중개회사도 속속 대두되고 있다.

크라이너 파킨스로 불리는 회사가 대표적이다.

이곳에는 넷스케이프 아마존 등을 키워낸 업계 최고의 벤처캐피털리스트인
존 도어 등이 일하고 있다.

지난 3월 델 컴퓨터가 인터넷으로 PC 주변기기를 판매하는 전자상거래회사를
설립한 것은 아마존과의 제휴를 통해 이뤄졌다.

이 때 양사의 회장인 마이클 델과 제프리 베조스를 연결시킨게 바로
크라이너 파킨스였다.

크라이너 파킨스는 웹사이트에 "계열" 이하는 한자어를 새겨 넣고 자신들이
투자한 1백여개 회사의 제휴상대를 찾아주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애플컴퓨터 출신의 가이 가와사키가 독립해서 하는 일도 벤처기업가와
투자회사를 연결시켜 주는 작업이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가와사키의 기업에 3백개 이상의 하이테크기업과
경영자들이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바로 가와사키의 인맥과 정보를 높이 산 때문이다.

< 박재림 기자 tree@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