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땅값을 모두 합하면 1천4백95조원(98년말 기준)이다.

국민총생산(4백50조원)의 3.3배에 달한다.

IMF관리체제이후 값이 급락했는데도 그렇다.

산업화가 시작된 60년대이후 우리는 높은 땅값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하지만 땅값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도입된지는 불과 1백년 남짓하다.

이는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시장에서 매매된지가 얼마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조선시대 말까지 토지는 국유지였다.

세조6년(1460년)에 제정된 전지가사매매한조(전지가사매매한조)에 따라
토지소유권이라 할 수 있는 지계의 거래가 허락됐다.

이때 매매된 건 오늘날의 사유화된 소유권이 아니었다.

토지에서 산출된 농산물중 일부를 사용료로 징수할 수 있는 권리의 매매에
불과했다.

본질적인 토지소유권은 국가에 있었다.

토지국가소유의 원칙은 1883년 맺어진 조선.영국 수호통상조약에서
허물어졌다.

그러나 당시엔 토지거래의 전제조건인 소유권에 대한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일본영사관의 요청에 의해 고종 30년(1893년) 한성부가 가권을
발급했다.

이것이 부동산 등기제도의 효시다.

이어 1900년엔 가권 발급규칙이 제정돼 지방으로 확대됐다.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제정된 것도 이 시기다.

을사보호조약이후 시행된 1906년 10월의 조선 부동산증명령과 1910년 3월의
조선민사령 및 조선부동산등기령에 의해 구체화됐다.

이때부터 땅값이란 개념이 나타났다.

이전에는 건물을 양도하면 토지는 대가없이 이전됐다.

1914년에야 이른바 "싯가지세"로 집터에 대한 세금이 부과되면서 토지에
대한 별도의 소유권과 가격이 매겨졌다.

이는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후 확실하게 정착됐다.

1918년 남북한의 땅값은 당시 가격으로 총 8억8천만원 정도로 추산된다.

남한 토지만을 계산하면 약 4억원, 평당 1.5전 수준이었다.

이후 해방무렵까지 땅값은 약 2배 올라 남한의 땅값은 8억~10억원, 평당
3전 정도였다.

해방이후 인플레가 심해지면서 땅값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농지개혁이 단행된 1950년 전국의 토지가격은 4천6백억원에 달했다.

평당 가격은 농지 4원, 임야 39전, 대지 20원이었다.

62년 경제개발이 시작되자 토지는 말 그대로 노다지가 됐다.

63년 전국의 땅값은 1조8천억원에 이르렀다.

땅값은 시간이 지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70년엔 26조원, 80년엔 2백63조원, 90년엔 1천3백51조원에 달했다.

해마다 2배이상 뜀박질한 것이다.

우리나라 땅값이 가장 높았던 때는 지난 92년이었다.

전체 땅값이 무려 1천8백조원까지 치솟았다.

토지공개념 도입이후 땅값은 다소 주춤하다 IMF관리체제를 맞았던 지난
98년엔 1천4백95조원대로 떨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평당 5만원, 1인당 3천3백만원의 자산을 갖고 있는 셈이다.

용도별 땅값도 지난 1백년동안 많이 변했다.

우리의 경제 및 산업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농업이 중심이던 예전에는 문전옥답이라고 불리는 논이 가장 비쌌다.

그러나 91년을 기점으로 대지로 용도변경이 수월한 밭의 시세가 높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난 76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곳은 남대문로2가에 있던
알파약국 자리였다.

그러나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상업용지보다 업무용지 값이 더 나가게 됐다.

77년이후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은 명동2가 한빛은행(옛
상업은행) 명동지점 자리가 지키고 있다.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해도 현재 평당 1억원이 넘는다.

< 유대형 기자 yoodh@ 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