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를 보면 첫머리에 한국자본시장의 옛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정주사는 시방 미두장앞 큰 길 한복판에서 다 같은 하바꾼(절치기꾼)이로되
나이 배젊은 애송히 한테 멱살을 당시랗게 잡혀가지고는 죽을 봉욕을 당하는
참이다. 시간은 오후 두시반, 후장 대판시세이절이 들어오고...''

정황으로 보아 미두장에서는 상당한 투기거래가 이루어지고 정 주사라는 등
장인물은 그 와중에서 결제도 못할 만큼 돈을 다 털려 봉변을 당하는 것같다.

정 주사가 돈을 다 날린, 투기성이 가미된 이런 미두장이 바로 한국
자본시장의 효시다.

미두장이 한국에 등장한 것은 20세기초.정확히는 1899년 6월에 인천
미두취인소가 문을 열었으나 상징적인 개장에 그쳤으며 뒤이어 1906년 주요
항구도시에 잇달아 미두장이 세워진 뒤 미두장이 자본시장의 형태를 갖췄다.

미두장이 한국 자본시장의 효시라고는 하나 사실은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거래 참가자가 우선 극소수에 그쳤다.

상인들만이 참여하다보니 거래규모도 크지 않았다.

미두장으로부터 시작된 20세기 한국자본시장 역사는 6.25전쟁이 끝난 53년
새로운 장으로 들어선다.

대한증권업협회가 만들어져 자본시장의 실체인 증권거래소 설립이 본격적
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

각고의 노력끝에 56년 2월 대한증권거래소가 서울 명동에 설립됐다.

3월에는 역사적인 개장식을 가졌다.

한국자본시장의 탄생이었다.

대한증권거래소 개장 초기에는 50년에 발행된 "건국국채" 등 국채를
중심으로 매매됐다.

주식회사가 희소해 거래할 주식이 없었던 터였다.

주식거래가 활기를 띤 것은 61년 5.16혁명 직후부터다.

혁명정부가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증권시장을 자본조달의 창구로 적극적으로
활성화한 결과다.

증권거래의 제도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증권거래법과 새로운 상법도
제정됐다.

당시 상장된 회사는 12개에 불과했다.

62년 5월까지 공기업인 한국전력 등의 주식을 분산매각, 주식공급을 늘렸다.

주식거래 매매제도 곳곳에 문제점이 발견됐다.

증권회사의 결제불이행사태로 62년 5월에는 증권파동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69년에 현재와 같은 3일 결제의 보통결제제도가 도입됐다.

더 나아가 한국자본시장 발전을 재촉한 자본시장육성법 제정(68년말)을
서두르게 했다.

68년말 당시 상장회사는 34개, 증권회사는 27개였다.

71년 9월에는 그동안 적용해 왔던 격탁매매제도가 보완되고 개별경쟁매매가
도입됐다.

73년 소액투자자들의 단주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해 증권거래소 내에 거래소의
상징인 6각형의 포스트가 만들어졌다.

75년부터 개별경쟁매매방식의 포스트매매제도가 전면실시됐다.

한국자본시장은 이후 내적인 진통과 거센 외풍을 맞아야 했다.

두 차례의 국제석유파동과 증시폭락, 건설주파동 등 심한 부침을 겪었다.

73년말 제1차 석유파동이 불어닥쳐 주가폭락사태를 맞기도 했다.

증권시장 감독기능도 강화돼 76년에는 증권감독원이 발족됐다.

77년 2월에는 자본시장의 균형발전을 위해 채권시장육성방안이 발표됐다.

79년에는 명동 거래소시대의 막을 내리고 현재의 여의도 거래소시대가 막을
올렸다.

경제성장과 함께 자본시장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방증이었다.

여의도 이전의 기쁨도 잠시뿐 82년 5월말 건국이래 최대 어음사기사건인
"이철희.장영자부부 사건"이 터졌다.

그 여파로 금융긴축하에서 기업들의 주요 자금조달 통로 역할을 했던
사채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상장사들은 부도로 나가떨어졌다.

증시가 온전할리 없었다.

83년부터는 새출발을 다짐했다.

80년 1월4일을 기준시점으로 한 싯가총액방식의 종합주가지수가 83년
1월4일부터 산출돼 발표됐다.

주식매매 전산화시스템도 도입됐다.

여의도 시대가 개막된 이후 한국자본시장의 숙제는 개방화와 국제화였다.

국내 기업들이 해외증권을 발행해 외국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했다.

외국인의 한국투자펀드인 "코리아 펀드"가 설정됐다.

92년 4월1일에는 외국인에게 국내 주식투자가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시련은 다시 찾아왔다.

97년말 단군이래 최대외기인 외환위기를 맞았다.

주가가 280선까지 붕락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상장사의 투명경영과 탄탄한 재무구조 등 건전한 자본시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외환위기는 98년 상반기 포철 등 일부 공기업을 제외한 전종목에 대해
외국인투자한도를 철폐하도록 만들었다.

채권시장도 활짝 열어야 했다.

한국자본시장이 완전히 개방된 것이다.

96년과 97년에는 선물시장과 옵션시장이라는 파생상품시장이 각각 개설됐다.

벤처와 중소기업들의 자금조달을 돕기 위해 96년 7월에는 코스닥시장이
개설됐다.

99년 들어 코스닥시장은 급성장을 보였다.

12월7일 현재 싯가총액이 50조원(거래소시장의 약 6분의 1)을 돌파했다.

20세기 마지막장인 99년, 한국자본시장은 또 색다른 경험을 겪게 됐다.

첨단 정보통신매체의 급속한 발전에 능동적으로 발을 맞춰야 했다.

인터넷, PC 등을 통해 증권객장을 찾지 않고서도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사이버 주식거래시대가 열렸다.

99년 12월초 현재 주요 5대 증권사의 사이버계좌수는 1백만개에 달했다.

1월부터 11월까지의 사이버 주식거래대금은 3백50조원을 웃돌았다.

한국자본시장은 이제 새천년을 맞을 채비를 끝냈다.

< 김홍열 기자 comeon@ 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