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분 < 방송 작가 >

"서울 경기지방, 어제보다 기온이 한층 더 떨어지겠습니다"

겨울철에 추워진다는 당연한 일기예보인데도 그 소리를 듣고 가슴 졸이는게
요즘의 내 모습이다.

기상캐스터는 기온이 낮아진다고 말했을 뿐이지만 내귀에는 "이제 추우니까
내년 봄까지 골프 끝입니다"로 들린다.

제 아무리 춥고 외로운 겨울문턱에서도 이렇게 막막한 느낌은 없었는데
지금은 추위라는 단어에 온 신경이 쓰이며 쓸쓸해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착각 현상까지 생긴듯하다.

TV 골프중계에서 파란 잔디만 보여도 풀내음이 솔솔 나는 듯하고 페어웨이
한가운데 놓인 볼을 보면 내가 화면 속으로 들어가 5번 우드로 멋지게 쳐내야
할 것 같고...

아무튼 TV를 보는 동안엔 손과 어깨가 근질거려 견딜수가 없다.

하지만 마음만 그렇게 간절할 뿐 막상 매서운 겨울 바람부는 산속에서
18홀을 돌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러니 일기예보가 더욱 가슴아프게 느껴질수밖에.

이렇게 마음의 병이 깊어갈 무렵 골프광 한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 말씀이 진정한 골퍼는 겨울에 판가름난다는 것이었다.

실례로 자신은 추운 겨울, 다른 날도 아닌 크리스마스까지 새벽 세시에
털목도리를 두르고 나가 골프장 문열기를 기다린 시기를 거쳤다고 한다.

조금만 있으면 골프칠 생각에 추워도 추운줄 몰랐다고.

그런 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싱글이라는 핸디캡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과연 나도 그럴수 있을까?

며칠전 나는 굳은 맘으로 겨울 칼바람을 헤치고 연습장에 갔었다.

그것도 밤늦은 시간에.

사람들이 돌아가고 아무도 없는 연습장.

나는 타석에 불을 켜고 들어가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비록 콧물을 훌쩍거리느라 정신없었지만 겨울밤공기를 가르고 깡깡
뻗어나가는 드라이버샷을 보는 느낌이 강력했다.

온세상에 소리라고는 내 드라이버샷 소리뿐인 듯 싶었다.

볼은 얼얼해 왔지만 그 상쾌함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느낌은 마치 학창시절 늦은밤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와 비슷했다.

겨울 골프에는 그런 뿌듯함이 있는 듯하다.

학창시절 공부엔 타의에 의한 의무감도 있지만 한겨울 골프는 순수하게
자의에 의한 노력.

이 겨울 난 일기예보와 관계없이 칼을 갈 각오가 돼있다.

추위를 헤치며 내년봄 화려하게 피어날 골프를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올 시즌 내내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내 라이벌 K언니.

내가 혹독한 겨울 연습을 각오한 이상 이제 K언니의 시대는 갔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