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상 < 전 한국은행 총재 >

한국이 공업부문에 강점을 가졌음에도 금융위기를 겪게 된 것은 1차적으로
90년대 초 기업에 대한 외환통제를 포기했던 탓이다.

정책없는 자유화조치는 마치 번잡한 교차로에서 신호등을 철거한 것과
같았다.

국내의 고금리 상황은 기업을 값싼 해외차입으로 내몰았고 결국 원화의
과대평가와 대외수지 악화를 야기했다.

기업 금융 정부부문의 지배구조가 취약한 상태에서 취해진 무리한 자유화
조치는 국민의 금융자산이 통치적 차원에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망각한 것이었다.

IMF는 시장여건 변화와 위기의 전염성에 대응할 수 있도록 기존의 프로그램
보다 엄격한 구조개혁을 한국에 요구했다.

그러나 구조조정 와중에 경기침체는 예상외로 심해졌고 IMF는 개혁이
성공할지 또는 지속적인 성장기반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 자신을 잃어갔다.

금융위기 이후 한국이 겪은 신용경색 (Credit Crunch) 은 너무도 값비싼
대가였다.

신용경색은 우선 상대적으로 느슨한 관리와 규제를 받은 제2금융권에서
비롯됐다.

예금이 은행권을 이탈해 종합금융사 등 제2금융권에 몰리자 기업들은
CP(기업어음)와 같은 제2금융권의 초단기차입에 의존하는 비율을 높여갔다.

담보도 없고 자금용도에 제한도 없는 이런 대출은 롤오버(회전대출)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일단 특정기업에 대한 대출금회수가 시작되자 금융권
전반에 도미노처럼 파급됐다.

여기에 은행의 BIS비율을 8%로 높이도록 한 IMF의 무리한 요구가 더해지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돌아갔다.

주가폭락으로 증자가 불가능해진 은행들은 대출금회수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운전자금마저 회수당한 2만3천여개의 중소제조업체는 파산했고 1백70여만명
이 직장을 잃고 거리를 헤맸다.

소비가 줄자 당연히 생산도 급감했다.

정상이었던 기업마저 문을 닫게 되자 은행의 BIS비율은 오히려 더 떨어졌다.

IMF는 바람직한 BIS비율을 달성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두어야 했다.

초기에 8%라는 높은 수치를 강요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킨 계기였다.

필자는 최근의 금융안정이 IMF의 금융구조조정 효과라기보다는 정부가
은행에 공적자금을 넣은 결과일 뿐이라고 믿는다.

외환위기 발생이후 IMF가 요구한 30%수준의 고금리정책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고금리정책은 남미 러시아 등에 적용된 시카고학파의 실질금리이론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IMF는 고금리정책이 화폐가치하락과 인플레이션 사이의 나선형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금리가 비용상승(cost-push) 인플레이션과 수요견인(demand-pull)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처사였다.

특히 차입에 크게 의존하는 개발도상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고금리 상황에서 기업은 이자를 갚기 위해 제품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

한편 제품수요 감소를 겪는 기업은 손실을 보충하고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자금차입을 늘려야 한다.

정부로서도 소중한 외화를 벌어들이는 기업의 도산을 막기 위해 대출증가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IMF는 세계적인 통화위기를 다루면서 역사적 교훈을 참고할 때가 됐다.

"값싼 자본의 경제적 중요성"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고금리는 산업과 고용의 창조자인 슘페테리안
기업가들에게는 약탈행위와 같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도 중앙은행을 세워 값싼 자본을
능력있는 기업가에게 빌려줬기 때문이다.

저비용 자본의 철학과 효용이 시카고학파의 실질금리이론에 의해 손상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시카고 학설의 폐해가 저비용 자본정책을 유지한 선진국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사업적 열망으로 충만했던 "빈손"의 개도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서글픔마저 갖게 한다.

개도국에서 고금리라는 인센티브를 통해 국내저축에 의한 투자자본 창출을
꾀하는 것은 허무한 이론이다.

IMF를 비롯한 국제금융기관들이 개도국의 경제성장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값싼 자본을 창출한 산업혁명기의 영란은행과 동일한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인플레이션 없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하도록 통화공급정책을 펴는
것은 모든 국가의 관심사다.

저축은 부족한데 경제는 계속 확대해야 하는 개도국은 통화공급을 늘려
인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다.

지난 83~88년의 한국은 값싼 자본정책, 즉 저금리정책을 통해 낮은 물가
상승률과 높은 성장률을 적은 통화량공급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훌륭히 보여줬다.

IMF는 특히 개도국의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달성할 수 있는 통화공급정책이
무엇인지 재고하길 바란다.

< 정리=박민하 기자 hahaha@ked.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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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6월 글로벌포커스지에 기고한 "한국 금융위기의 원인-IMF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