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베트남 '네이팜탄 소녀' '판티 킴푹 유엔친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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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킴푹 대사 약력 ]
<>63년 베트남 프램방 출생
<>72년 트램방마을 폭격으로 전신 3도화상
<>86년 쿠바 하노버대 유학
<>92년 남편 후이 토안과 결혼, 캐나다 뉴펀드랜드에서 망명
<>97년 유네스코 평화문화 친선대사로 임명
<>현재 남편, 두 아들과 함께 토론토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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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72년, 당시의 비극적인 참상을 생생하게 알리는
사진 한장이 AP통신을 통해 전세계로 타전됐다.
온 마을이 네이팜탄으로 불타자 전신에 3도화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울부짖
으며 뛰쳐 나오던 아홉살 소녀의 모습이었다.
AP통신 닉 우트(48)기자의 카메라에 찍혀 그에게 퓰리처상의 영예을 안겨
주었던 사진속 주인공이 한국을 찾았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퓰리처상 사진대전 20세기 고별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판티 킴푹(36) 유엔 평화문화 친선대사.
''네이팜 소녀''로 더 잘알려진 그녀는 이제 불혹을 바라보는 두 아이의
엄마로 변해 있었으며 당시의 충격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밝은
얼굴이었다.
킴푹 대사는 "당시 길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는 소녀의 모습은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평화를 갈구하는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며 "이 사진 한장이
베트남전을 바라보는 세계의 눈을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사진 한장이 자신의 인생 또한 크게 바꿔놨다고 덧붙였다.
"비행기 엔진소리가 들린 후 곧바로 굉음과 함께 주변이 온통 불바다로
변해버렸죠. 두발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마을에서 뛰쳐
나왔습니다. 닉 우트씨가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도, 그 후에 그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됐다는 사실도 생각이 안납니다"
그녀는 기억하기조차 끔찍스런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킴푹대사는 당시의 폭격으로 14개월동안 무려 17번에 걸친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질곡많은 삶은 이어졌다.
철저히 다른 인생을 살아야 했다.
사진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는 그녀늘 TV에 출연시키는 등 정치적 선전활동에 이용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결국 킴푹 대사는 억압받는 생활을 벗어나 자유세계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86년 사이공을 떠나 쿠바의 하바나 대학에서 공부하다 현재의 남편을 만나
모스크바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캐나다로 망명했다.
킴푹 대사는 "사진속의 주인공이 돼 전쟁의 상징처럼 인식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사진 한장이 결국 인생을 변화시켰다"며 "다시는 나같은 불행한
사람이 없게 전쟁 종식을 위해 일하라는 뜻으로 알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난 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유엔평화문화친선대사로 임명돼 전세계
각국을 돌면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또 킴푹재단을 설립, 지뢰로 다친 어린 희생자를 돕는 사업도 펼치고 있다.
킴푹 대사는 "전세계를 돌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비폭력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며 "앞으로도 전세계 전쟁 고아와
평화운동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 양준영 기자 tetrius@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30일자 ).
<>63년 베트남 프램방 출생
<>72년 트램방마을 폭격으로 전신 3도화상
<>86년 쿠바 하노버대 유학
<>92년 남편 후이 토안과 결혼, 캐나다 뉴펀드랜드에서 망명
<>97년 유네스코 평화문화 친선대사로 임명
<>현재 남편, 두 아들과 함께 토론토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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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72년, 당시의 비극적인 참상을 생생하게 알리는
사진 한장이 AP통신을 통해 전세계로 타전됐다.
온 마을이 네이팜탄으로 불타자 전신에 3도화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울부짖
으며 뛰쳐 나오던 아홉살 소녀의 모습이었다.
AP통신 닉 우트(48)기자의 카메라에 찍혀 그에게 퓰리처상의 영예을 안겨
주었던 사진속 주인공이 한국을 찾았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퓰리처상 사진대전 20세기 고별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판티 킴푹(36) 유엔 평화문화 친선대사.
''네이팜 소녀''로 더 잘알려진 그녀는 이제 불혹을 바라보는 두 아이의
엄마로 변해 있었으며 당시의 충격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밝은
얼굴이었다.
킴푹 대사는 "당시 길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는 소녀의 모습은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평화를 갈구하는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며 "이 사진 한장이
베트남전을 바라보는 세계의 눈을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사진 한장이 자신의 인생 또한 크게 바꿔놨다고 덧붙였다.
"비행기 엔진소리가 들린 후 곧바로 굉음과 함께 주변이 온통 불바다로
변해버렸죠. 두발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마을에서 뛰쳐
나왔습니다. 닉 우트씨가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도, 그 후에 그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됐다는 사실도 생각이 안납니다"
그녀는 기억하기조차 끔찍스런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킴푹대사는 당시의 폭격으로 14개월동안 무려 17번에 걸친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질곡많은 삶은 이어졌다.
철저히 다른 인생을 살아야 했다.
사진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는 그녀늘 TV에 출연시키는 등 정치적 선전활동에 이용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결국 킴푹 대사는 억압받는 생활을 벗어나 자유세계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86년 사이공을 떠나 쿠바의 하바나 대학에서 공부하다 현재의 남편을 만나
모스크바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캐나다로 망명했다.
킴푹 대사는 "사진속의 주인공이 돼 전쟁의 상징처럼 인식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사진 한장이 결국 인생을 변화시켰다"며 "다시는 나같은 불행한
사람이 없게 전쟁 종식을 위해 일하라는 뜻으로 알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난 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유엔평화문화친선대사로 임명돼 전세계
각국을 돌면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또 킴푹재단을 설립, 지뢰로 다친 어린 희생자를 돕는 사업도 펼치고 있다.
킴푹 대사는 "전세계를 돌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비폭력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며 "앞으로도 전세계 전쟁 고아와
평화운동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 양준영 기자 tetrius@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