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뿌리는 이토록 질긴 것일까.

사람살이의 연줄이란 맺기보다 풀기가 더 힘든지 모른다.

이경자(51)씨의 장편소설 "정은 늙지도 않아"는 7편의 연작으로 이뤄져
있다.

작가는 한 남자와 두 여자의 굴곡진 삶, 그 인연의 밑뿌리를 일곱개의
시선으로 비춘다.

남편과 본처, 첩실의 삶이 관습과 도덕, 제도의 덧칠로 인해 얼마나
기묘하게 얼룩지는가를 보여준다.

강원도 토박이 입말에 담긴 이들의 사랑은 투박하면서도 속깊은 질그릇 맛을
자아낸다.

가슴 뭉클한 슬픔을 절제된 어법으로 직조해낸 문체도 감동을 더한다.

남편 도철과 아내 필례, 아이를 낳아준 젊은 첩 영실의 인연이 큰 줄기다.

강원도 산골 방축골.

도철은 첫번째 아내를 잃고 필례에게 새 장가를 든다.

그는 "필례를 얻기 위해 전처가 죽었나 보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접살림에
재미를 붙인다.

그러나 필례는 첫날밤부터 당혹해한다.

전처가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 신혼의 단꿈을 흐려놓는 데다 아기마저
들어서지 않아 애를 태운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죄책감에 못이겨 그녀는 제 손으로 수많은
첩을 들인다.

그렇지만 남편이 딴 여자와 한 방에 드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녀의 시샘 탓인지 첩들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

작가는 이들 부부의 안타까움과 필례의 속앓이를 다양한 프리즘으로
조명한다.

쉰 일곱이 됐을 때, 절름발이 영실의 몸을 통해 아들 귀동이를 얻게 되자
필례의 고통은 볼록렌즈의 햇볕처럼 뜨거워진다.

읍내 작은 집으로 남편을 보내고 방축골에 혼자 남은 그녀가 본처와 첩실
사이에서 마음 고생하는 남편을 배려하는 대목도 아릿하다.

그러다 필례가 제초제를 먹고 세상을 떠나는 장면에서 소설은 세차게
꾸불텅거린다.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이 땅 밑에서 옹이를 재우고 있던 인연의 뿌리들을
옹골차게 밀어올린 것이다.

영실은 "나를 몹쓸년으로 만들고 간다"며 울부짖다가 그래도 정성껏 장사를
지내주지만 필례는 밤마다 영실 앞에 나타난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두 여자의 운명은 서로 발뒤꿈치를 밟고 엎어지듯 그렇게 얽혀 있다.

그들의 화해는 해원굿을 통해 이뤄진다.

무당의 몸을 빌려 영실과 필례가 통곡하며 "다 울지도 못하고 죽은" 한을
달래는 과정이 상징적이다.

평생 필례를 사랑했지만 가슴에 못질만 한 도철의 회한도 애잔하다.

그는 어느날 낮꿈에 찾아온 필례를 만난 뒤 방축골로 찾아간다.

그리고 부친의 묏자리 아래 명당을 자식낳은 영실에게 주기로 하고 자신은
필례의 무덤 곁에 묻히기로 결심한다.

작가는 끈질긴 인연의 뿌리를 통해 저승까지 이어지는 정의 의미를
그려보인다.

그동안 "절반의 실패" "혼자 눈뜨는 아침" "황홀한 반란" 등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해온 것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그는 이제 "말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독자들을
그곳으로 이끈다.

그래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고 맨발로 흙을 밟듯 인생의 속살을
찬찬이 드러내고 싶었다"는 얘기가 진득하게 다가온다.

< 고두현 기자 kdh@ 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