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1888~1968)는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린다.

"임꺽정"의 작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항일운동가였던 그의 삶과 문학은
그러나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임꺽정"이 지하서적이 아닌 버젓한 간행물로 등장한 것 자체가 월북작가
해금이 이뤄지고 난 91년 가을이었던 탓이다.

최근 나온 강영주교수(상명대)의 "벽초 홍명희연구"(창작과비평사 간)에
따르면 벽초는 일찍부터 깨인 인물이었다.

유수한 선비집안 출신임에도 조선시대 당쟁의 폐해는 물론 관벌주의로 인한
양반층의 허례허의를 통렬히 비판했다.

재일조선인 유학생단체인 대한홍학회 회지에 발표한 "일괴열혈"에선 지방열
을 민족의 대동단결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요인으로 지적했다.

여성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광복후 주도한 민주통일당 정책에 "여자의 시간과
정력을 가정생활에 전부 소모치 않도록 공동 식당, 탁아소, 세탁소 등의
시설을 속히 보급시킬 것"이라는 조항을 두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벽초의 참모습은 어디까지나 작가적 태도에서 찾아진다.

밤낮 안가린 독서열은 유명하거니와 "임꺽정" 집필중 얼마나 각고정려,
퇴고에 힘을 기울였는지는 조용만의 회고에서 잘 드러난다.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벽초는 방석밑에 깔아뒀던 소설원고를
꺼내 몇자 고쳐쓰고 다시 넣었다. 지우고 또 써서 까많게 된 원고지를 꺼내
읽더니 씁쓸하게 웃으면서 "괜히 헛수고했군. 처음 쓴것이 나은것을 쓸데없이
고쳐가지고 허허"하고 다시 방석밑으로 밀어넣었다. 이렇게 고치고 또 고친
원고가 신문에 난 것을 보면 물 흘러가는 것같이 술술 내려가는 문장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임꺽정"만은 사건 인물 묘사 정조 모두 순조선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다짐 덕일까.

"임꺽정"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조금도 고루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말과 풍속사전을 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답고
토속적인 고어와 속담, 걸쭉한 생활묘사로 가득하다.

"깨끗한 조선말 어휘의 노다지가 쏟아지는 것을 발견할수 있다"(이극로)는
말이 실감날 따름이다.

고유의 옛말이 자꾸 사라지는 지금, 벽초의 우리말 사랑과 독서열 글쓰기에
대한 엄격한 태도는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