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이남 공주강 바깥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 방향으로 뻗었고 인심도
그러하니...정치에 참여시키지 말라"

1천여년 전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10조"의 여덟번째 조항이다.

이 때 대광 박술희는 군주의 지역차별이 국론 분열을 가져온다며 극구 반대
했다.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이 종식되면 이 조항은 삭제하라"는 단서를
붙여달라고 진언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왕건은 결국 단서를 허락했다.

중견작가 최범서(59)씨의 역사소설 "고려태조 왕건"(전3권, 동방미디어)에
나오는 대목이다.

최씨는 이 작품을 통해 그 단서의 훼손이 우리 역사에 두고두고 논란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누가 단서를 지워버렸을까.

작가는 훈요10조 원본이 거란족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는 데 주목한다.

나중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사본을 얻어 간직했다가 세상에 전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글이 개인의 집에서 발견됐다는 데 있다.

신라계 인물인 이들이 후백제계의 정계진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도
의문이다.

정치적 의도에 의한 위작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된 해석도 지적한다.

"공주강(금강)바깥"을 "공주강 남쪽"으로 잘못 해석했다는 얘기다.

"바깥"이라는 표현을 원뜻대로 분석하면 "차현(차령산맥) 남쪽과 공주강
북쪽"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호남차별의 굴절된 역사 인식을 거꾸로 파헤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1세기 전의 영웅을 왜 지금 돌아봐야 하는가를
일깨워준다.

한마디로 왕건이 펼친 "덕망과 포용의 큰 정치"를 배우자는 것이다.

왕건의 포용정치는 고려건국과 삼국통일의 토대가 됐다.

그는 갈등을 겪을 때마다 민심을 먼저 생각했다.

전쟁중에도 약탈을 금하고 점령지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는 궁예의 측근 신숭겸과 배현경을 끌어들이고 발해의 유민들도 포용했다.

최대 정적인 진훤(견훤)까지 받아들였다.

그는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초심으로 돌아가 역사의 책갈피에서 교훈을
찾으라고 강조한다.

< 고두현 기자 kd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