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거스보드"(Smorgasbord)란 게 있다.
버터 거위 식탁의 합성어이지만 사전에서는 서서 먹는 바이킹풍 요리,
오르되브르 따위를 갖춘 뷔페식 식사, 그리고 웹스터사전에서는 좀더
상세하게 "다양한 음식과 요리, 즉 오르되브르, 차거나 더운 육류, 그리고
오이절임 생선 소시지 치즈 샐러드 양념이 곁들여진 점심 혹은 저녁뷔페"
라고 설명하고 있다.
간략히 말해서 뷔페, 우리식으로 말하면 아마도 비빔밥에 가까운 내용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외지에서 누군가가 유럽연합(EU)을 스모거스보드에 비유한 적이
있다.
유럽합중국 건설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통합을 추진해가고는 있지만
계속 불어나는 회원국, 그러면서 갈수록 다양화하는 민족 언어 이해관계와
조직의 비대화, 그로인한 정책결정 및 통합작업 지연 등의 문제를 이런
비유로 꼬집은 것이다.
지금 순간 세계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EU의 역내 현안은 영국과 프랑스간의
쇠고기 분쟁이다.
지난 96년초 광우병 파동으로 단행됐던 영국산 쇠고기의 유럽대륙내 반입
금지조치를 금년 8월 EU집행위가 영국의 엄격한 안전조치 이행을 조건으로
일단 해제했는데도 유독 프랑스만은 계속해서 반입금지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영국에서는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프랑스산 제품을 철수하는 등
감정적 대응으로 맞서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쟁은 실상 극히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분쟁은 EU가 지난 1952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 등
6개국만으로 유럽석탄철강공동체란 이름으로 처음 출범을 한 이래 반세기
동안 수없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U가 현재 안고 있는, 그리고 장차 21세기에도 계속해서 겪게 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쉴새없는 새 회원국의 추가 가입이다.
지루한 가입협상이 계속될 터이고 새 식구가 늘어날 적마다 조직개편과
언어문제, 새로운 내부갈등과 마찰이 생겨날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제각기 다른 이행조건과 과도기를 거쳐 온전한 새 식구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른다.
결국 EU의 팽창행진은 21세기 EU의 모습, 다시 말해서 국제사회내 EU의
정치.경제적 위상과 역할은 물론 유럽통합의 내용과 장래 그 자체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20세기 후반 "EU의 반세기"는 통합노력과 확대과정의 연속으로
요약된다.
처음 6개국에서 9개국(73년)으로, 12개국(86년), 그리고 지금의 15개국
(96년)으로 불어났으며 현재 가입협상이 진행중인 6개국 말고도 또다른
6개국이 가입을 요구, 조만간 협상이 개시될 예정이다.
이들 12개국 가운데 키프로스와 몰타를 뺀 나머지 10개국은 전부 옛 동구
공산권국가들이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들의 가입은 언제건 실현될 것이다.
물론 그 시기는 국가마다 다를 것이다.
이밖에 터키와 스위스는 87년과 92년에 이미 가입신청을 낸 적이 있고
노르웨이 및 아이슬란드가 잠재후보로 생각되고 우크라이나도 희망하면
고려해볼 대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10년안에 EU는 러시아를
제외한 우랄산맥 서쪽과 대서양 사이를 포괄하는 거대 유럽(Greater Europe)
으로 새롭게 탄생할 전망이다.
EU의 확대는 여러가지 문제를 수반한다.
집행위와 의회 등 각급 기구의 조직과 인원, 예산과 분담금이 늘어나야
하고 언어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데다 주요 정책의 신속한 결정, 효율적
집행이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당연히 통합속도도 더뎌질 수밖에 없다.
특히 언어문제는 지금도 15개 회원국이 11개국어를 사용하는 등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어서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할 입장이다.
게다가 새로 시장경제에 편입된 동구의 새 회원국들에 대한 기존 회원국의
가중될 지원부담, 걸핏하면 탈퇴 운운하는 영국의 변덕, 뿌리 깊은 독일과
프랑스의 반목 등을 극복해야 하는 것 등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EU가 다가오는 21세기에 세계에서 한층
강력하고 거대한 정치 경제세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12개국의 추가가입이 실현될 경우 EU는 5억 가까운 인구의 막강한 경제력과
시장이 된다.
또한 러시아에 저항할 "안보우산" 역할을 나토와 EU에 기대하는 동구 국가
들과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고 싶어하는 기존 EU의 욕구와도
합치하여 정치적 결속력도 그만큼 강화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유럽은 예나 지금이나 먼 상대다.
그다지 관심이 없다.
뉴스도 그렇고 화제에 오르는 일도 드물다.
미국에 갖는 관심의 절반만 유럽에 쏟아도 사정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