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학계의 석학 제라르 데스탄느 드 베르니스 교수(프랑스 그르노블대
명예교수)가 한국경제신문 창간 35주년을 축하하는 뜻에서 최근 한경을
방문했다.

"그르노블 조절이론"이란 경제이론을 창시한 드 베르니스 교수는 유럽의
대표적인 지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프랑스 경제학계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제자인 서익진
박사(경남대 지역문제연구원 교수)와 "세계경제, 어디로 가는가"란 주제로
대담을 나누었다.

이날 사회와 정리는 고승철 산업2부장이 맡았다.

대담 내용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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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전세계의 많은 경제.사회학도로부터 존경을 받는 베르니스 교수님
께서 한국경제신문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께서 창시한 그르노블 조절이론은 세계경제의 흐름을 설명하는데 탁월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지요.

두 학자께서 세계경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 제라르 데스탄느 드 베르니스 교수 =한국에서도 제 이론을 지지하는
분들이 많아 놀랐습니다.

이번에 대구라운드, NGO 서울대회에서 주제발표를 했는데 적잖은 청중이
왔더군요.

<> 서익진 박사 =베르니스 교수님 강연을 통역하면서 청중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자신도 조절이론에 매료돼 프랑스에 가서 교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지요.

한국의 성장모델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 베르니스 =저는 한국의 발전상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발전과정은 "야생 기러기 편대 모델"로 대체로 알려져 있지요.

사실 역사상 어느 개도국에서도 성장정책이 한국에서처럼 성공을 거둔 곳이
없지 않습니까.

한국이 시행한 산업 보조금제도와 농업보호는 독특합니다.

복수환율제를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죠.

여느 개도국에 비해 한국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목표와 실천력을 겸비
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개도국들을 위해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 서 박사 =한국의 보조금제도 덕분에 기업들은 수출하는데 유리했습니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설비투자를 하고 또 수출하고..., 이런 식으로
확대성장했지요.

<> 사회 =교수님께서는 한국을 처음 방문하셨지요.

<> 베르니스 =그렇습니다.

한국에 대한 첫 느낌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한국의 겉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아주 상이한 구역들이 섞여 있다는 점, 아시아 나라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듯이 수많은 소상점들이 즐비하다는 점, 또 도처에 솟아있는 대규모
빌딩들이 그것입니다.

특히 여의도 금융중심지의 빌딩숲은 인상적이었지요.

서울과 대구가 보여주는 역동성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역동성은 도시 교통의 혼잡, 공항들의 규모, 상업활동 등으로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 서 박사 =한국이 생각 이상으로 현대화된 것으로 보인다는 말씀이군요.

교수님께서는 "대구 라운드 글로벌 포럼"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개도국들의
외채 탕감이 시급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 논거를 설명해 주십시오.

<> 베르니스 =이 문제는 매우 긴 설명을 요합니다.

너무 간단히 말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개도국 채무와 관련해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선진국이 개도국을 빚지게 만들었다"고 해야 옳은 표현 아닐까요.

미국의 오랜 대외적자 탓에 국제금융시장에서 달러가 엄청나게 늘어
났습니다.

미국은 뭉칫돈을 발행해 적자를 메워야 했지요.

이런 달러를 예치 받은 은행들은 이를 어디엔가 투자해야 합니다.

넘치는 달러는 지난 73년의 제1차 석유파동 때 석유수입국들의 결제자금
으로 사용됐습니다.

이 돈은 곧바로 선진국 은행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오일달러의 환류"가 그것입니다.

<> 서 박사 =유럽 기업들이 이 달러를 빌려 시설현대화에 투자했지요.

미국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79년말 미국이 금리를 올리자 유럽 기업들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이 빚을 갚았습니다.

70년대 말에 유럽엔 디플레 현상이 두드러졌지요.

기업들은 재고가 쌓이는 바람에 설비투자를 늘릴 수 없었습니다.

자금을 쓰려는 기업이 줄어드니 은행금고엔 돈이 쌓였지요.

이 돈이 개도국으로 흘러간 것 아닙니까.

<> 베르니스 =그렇습니다.

당시 선진국들의 정부 기업 소비자 등은 모두 무거운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새로 은행돈을 빌려쓸 만한 주체는 개도국이었어요.

상대적으로 빚부담이 적었고 개발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개도국들에 제공되던 공공개발원조가 턱없이 모자랐으며 게다가 축소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행들은 개도국에 자금을 빌려 주고 짭짤한 이자수입
재미를 봤습니다.

<> 서 박사 =채무국들은 이자를 갚으려면 달러, 마르크, 엔 등 경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를 얻기 위해서는 헐값 수출이라도 감수해야지요.

외채를 가진 개도국 사정은 비슷하므로 수출가격은 더욱 떨어졌습니다.

<> 사회 =베르니스 교수님께서는 개도국의 외채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선진국에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외채탕감이 가능하다고 보시는지요.

<> 서 박사 =현재 선진국-개도국 사이의 세력관계를 감안할 때 좀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만...

<> 베르니스 =세력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저도 인정합니다.

현상황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알제리의 정치지도자 부메디엔은 75년 유엔총회 연설에서 개도국이
선진국의 장비재를 사들임으로써 선진국경제를 돕는다고 지적했지요.

부메디엔은 그 반대급부로 선진국은 개도국이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서 박사 =79년에 나온 브란트 보고서에서도 이 점이 지적됐습니다.

선진국은 디플레적 불황에 계속 빠져 있을 수는 없으며 개도국에 소득을
이전함으로써 개도국이 선진국의 물건을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요.

그래야 선진국도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교수님께서는 중심부(선진국)와 주변부(개도국)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지론을 갖고 계시지요.

<> 사회 =양자 관계가 돈독해질 수 있는 실현가능한 방안은 무엇입니까.

<> 베르니스 =개도국들이 번영에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미국이 1947년 마셜 플랜으로 다른 나라의 개발을 도운 것과 똑 같은
이치이지요.

빈자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홀로 부자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진국은 금융 영역에 지나치게 몰린 자본을 생산 영역으로 옮겨야 합니다.

개도국에서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대규모 투자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개도국은 물론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약간의 신규 외채를 지겠지요.

<> 서 박사 =개도국의 외채문제는 세계화가 낳은 주요 부작용 가운데 하나
라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세계화 때문에 어떤 다른 문제점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베르니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세계화는 무역을 확대한다고들 말하지만 이것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계생산의 상당 부분이 초국적 기업들의 내부 거래로 이루어
집니다.

초국적 기업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계열사나 공장들 사이에 다양한
부품들을 상호 이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유권의 변동이 없기 때문이지요.

무역은 재화의 단순한 지리적 이동으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둘째, 국제무역의 대부분이 소수 나라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집중과 합병은 시장경제체제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미 19세기 말에 반트러스트법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집중은 시장을 왜곡시킵니다.

넷째, 금융 위기 때문에 멀쩡한 공장시설이 고철덩이로 바뀔 수 있지요.

멕시코 위기나 아시아 위기는 이를 웅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 사회 =세계경제의 장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미국, 유럽연합(EU), 일본및 중국 등이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는 3극
체제가 가시화될 것인지요.

<> 베르니스 =3극 가운데 어느 1극이 주도하면 곤란합니다.

상호균형이 바람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적 규범들이 필요합니다.

국제 규범이 확립되면 세계가 불필요한 갈등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즉, 국제통화제도가 원활히 작동하고 자본부유국으로부터 자본빈국으로
투자가 이뤄지면 세계의 생산성을 증대될 것입니다.

국제사회에서도 구조적 불균형들을 고치려는 일관성 있는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 서 박사 =베르니스 교수님의 논지에 동의합니다.

3극이 모두 이성을 갖고 상호균형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인의 입장으로 보자면 한국은 3극 국가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독특한 나라입니다.

어느 한쪽에 쏠리는 것보다 균형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 사회 =한국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조언해 주신다면.

<> 베르니스 =진지한 대답을 하기엔 제가 한국경제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굳이 말씀드린다면 한국은 여러 면에서 앞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개도들과의 교역을 늘림으로써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한국이 개도국 사이에서 맏형 역할을 하면서 선진국과 연결 기능을 잘 하면
일종의 "세계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서 박사 =경제활동이 투명해져야 합니다.

이를 이루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뿌리를 내려야 하지요.

부패구조가 청산되지 않고선 질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투명성이 높아지면 상호신뢰가 생기고 불필요한 거래비용이 줄어들
것입니다.

<> 사회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경제신문의 역할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경제학자로서 이 점에 대해 언급해 주십시오.

<> 베르니스 =경제신문은 막중한 임무를 지녔습니다.

제 구실을 하자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도할게 아니라 속을 파헤치는
분석보도가 필요하지요.

일방적인 의견만 다루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다양한 시각과 목소리를 담아야지요.

모든 언론이 한 목소리를 내는 사회는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 서 박사 =유럽에서는 소수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매체가 무척 많습니다.

다양성은 높은 가치를 창출하는 원천입니다.

앞으로 한국경제신문이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경제지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작은 기사에도 국제적인 흐름을 반영하면 좋을 것입니다.

좋은 경제신문을 가진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 사회 =긴 시간 토론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리=고승철 산업2부장 che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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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 베르니스 교수 누구인가 ]

1928년생인 드 베르니스 교수는 "그르노블 조절이론"의 창시자이다.

그르노블 대학에서 숱한 학자를 양성했으며 현재 프랑스 그르노블 사회과학
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중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방대한 경제학연구소인 ISMEA의 회장이기도 하다.

이 연구소의 창설자는 프랑스 현대 경제학계의 태두인 프랑수와 페루.

드 베르니스 교수는 페루 교수의 수제자이다.

그의 대표 저작은 ''국제경제 관계(Relations Economiques
Internationales)''.

이 역저는 세계경제의 틀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꼽힌다.

그는 국제경제, 발전경제학에 관한 주옥같은 논문들을 수백편 발표했다.

조절이론의 핵심개념은 "접합"(configuration)이다.

국제관게, 생산방식, 금융관계 등 주요 부문들이 어떤 형태로 서로
맞물리느냐에 따라 체제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한동안 안정적인 접합이 유지되다가 새로운 접합이 만들어지면서 새
패러다임 경제로 바뀐다고 설명한다.

조절이론은 "그르노블 학파"와 "파리 학파"에 의해 정립됐다.

그르노블 학파는 국제관계를 파악해야 국내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파리 학파는 국내문제를 먼저 살핀 다음 국제관계를 따진다.

그르노블 학파는 베르니스 교수가 비조이고 보엘리, 제르비에, 서익진
박사 등이 주요 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파리 학파는 리피에츠, 브와예, 아글리에타 박사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