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의 몰락은 재벌체제 비판론자들에게 좋은 사례를 제공해 주고 있다.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데는 소홀하고 무리하게 확장만을 추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대우가 다국적 기업으로서 무형의
자산을 구축한 사실은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자본시장과 인재시장이 갖춰져 있지 못했던 지난 개발연대에 재벌
체제는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프런티어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앨리스 암스덴 미국 MIT교수의 지적대로 선진 공업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된 "후발공업국 패러다임"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계를 상대하는 기업가 정신이 길러지고 각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막대한 정보도 축적했다.

외국 파트너와 쌓아온 신뢰 덕분에 자본과 기술문제에서 협상력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같은 무형의 자산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대기업의 몸통에 행동지향적인 중소기업의 뇌와
정신을 가진 기업이 필요하다"는 잭 웰치 GE 회장의 지적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이를 한국적 상황에 적용시키면 재벌이 쌓아온 무형의 자산과 중소기업의
창의 및 혁신이 원활히 교환돼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관련, 송병락 서울대 교수는 "기업을 위한 변명"이라는 저서에서 그룹
체제의 강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삼성전자를 예시했다.

5년간이나 계속 적자를 냈던 삼성전자가 초일류 반도체기업으로 재탄생하기
까지는 그룹계열사들의 공동 보조가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산업 생태계적인 관점에서 바꿔 말하면 그룹체제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 사업체의 자본과 경영인력을 이용하는 일종의 "벤처
캐피탈" 역할을 할 수 있다.

상호지급보증과 순환출자가 단지 "수익성없는 사업을 연명시키는 수단"이
아닌 벤처캐피탈 역할을 한다면 그 순기능을 인정받을 수도 있다.

최근 등장한 삼성물산의 "골든게이트"나 포항제철의 "포스텍기술투자"가
좋은 사례다.

사내 벤처기업을 설립해 경쟁력을 갖춘 후 분사하는 방법도 유력하다.

이런 방식은 그룹이 가지고 있는 자본과 유통망, 세계적인 정보수집능력은
물론, 기업경영의 노하우를 컨설팅 해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그룹은 <>새로운 벤처사업을 위한 위험자본만 제공하고 기타 운영자금
은 자본시장이나 은행을 찾도록 해야 하고 <>자금을 한 벤처사업에서 다른
벤처사업으로 이동시키지 않으며 <>지원하는 벤처사업에 대한 세세한 간섭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 하버드대학 타룬 칸나교수의 충고다.

재벌이 가지고 있는 교육.경영훈련 프로그램도 살려나가야 할 "프론티어적
기능"이다.

인력양성에도 "규모의 경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대기업들은 선진국 수준의 사내 연수프로그램과 시설을 지니고
있다.

여기엔 막대한 정보인프라도 구축돼 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업현장에 노출시켜 경영자를 육성할 수 있는 기반도
있다.

다만 이같은 프로그램과 시설들이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점은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소기업 또는 대학과 연계해 이같은 시설과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경제
전반의 체질을 강화하고 기업경쟁력을 키우는데 유리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사실 기업구조개혁과 관련,많은 사람들이 내심 우려하는 점은 기존의 대기업
체제가 지닌 성장동력이 중소기업과 벤처 위주의 체제로 고스란히 이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어린애
를 감싸안 듯 이끌어 나가는" 경제체제를 지향한다고 밝힌 것도 이런 우려에
대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제품의 하청과 공급관계가 아니라 재벌이 지닌 무형의 인프라를
제공하고 이들의 경쟁력을 키워 주는 역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 박민하 기자 hahaha@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