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제정 ]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것은 지난 65년2월9일.

필자가 이 법의 골격을 세우다시피했다.

법 제정에 관여하게 된 것은 경제인협회 사무국장으로 취임한 62년10월부터
였다.

경제인협회 회장단과의 첫 대면 때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정림 회장과 이한원, 최태섭 부회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정림 회장은 필자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돈이 필요할 것이오.우리 경제인들은 정치자금을 낼
용의가 있소. 그러나 돈내고 뺨맞고 감옥에 가는 수모만은 제발 막아주시오"

자유당 말기와 5.16 군사정부가 경제인에 가한 처사가 너무도 분해서 이정림
회장은 눈물을 머금고 호소한 것이었다.

사무국장인 필자가 해결책을 갖고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62년11월 말 영국 시찰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 도쿄에서
"정치자금 법"에 관한 자료를 구했다.

사실 정치자금 양성화에 대한 첫 논의는 4.19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경제협의회는 창립선언문에 "정치로부터 경제의 자율과 이를 뒷받침할
정치자금 양성화"를 천명했다.

이어서 경제계는 61년3월 정치자금을 자발적으로 모았다.

4.19 일주년-.

위기에 휩싸였던 장면 정권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고수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연수 회장 주도로 협의회는 시국안정과 절량농가 구호를 위한 출연을
긴급하게 결의했다.

밀가루 1만5천부대, 현금 3억원 등을 장면 총리에게 전했다.

이 긴급 지원금으로 장면 정부는 하급 지방공무원, 경찰관들에게 구호
밀가루와 함께 약간의 수당을 지급할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4.19후 사회혼란은 급속히 안정돼 갔었다.

5.16후에는 민정이양을 위한 64년10월 대통령선거, 11월 국회의원선거가
있었으나 정치자금법을 제정할 분위기는 형성되지 못했다.

64년12월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경제인협회는 다시 정치자금법 제정에
관심을 갖는다.

당시 김용완 회장도 자유당말 준조세식 강제할당 정치자금 거출로 "부정축재
제1호"로 거명되기도 했다.

또 정계도 여당인 공화당,야당인 민중당 양당체제하에서 정치자금 양성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특히 야당은 양성화법이 제정되지 않을 경우 단돈 한푼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자금법률안을 작성하는데 일본 서점에서 얻어 온 작은 책자가 큰 도움이
됐다.

알고 보면 정치자금법 자체의 골격은 매우 간단했다.

일반 법률과 같이 "법목적"및 "정의"가 마련되면, 핵심은 "정치자금제공"과
"분배" 문제다.

목적이나 정의는 일본이나 미국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제1조 목적은 이렇게 규정됐다.

"이 법은 산업 경제인 기타 일반인이나 단체가 정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행위를 양성화함으로써 정치활동의 공명화와 건전한 민주적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에는 정당은 정당법 규정에 의하고, 정치자금은 정치활동에
소요되는 자금이나 유가증권 등을 말한다고 쓰여진다.

제3조(정치자금 제공)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기탁하되,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 법이 제정 1년이나 지나도록 기탁한 것은 단 한건, 1만20원에
불과했다.

이것도 경기도 화성군 농민의 모임에서 15명이 품삯을 모아 기탁한 것이다.

이와 관련 66년 경협 3월호(p.13)에 기고한 고흥문(작고.민중당 사무처장)씨
의 글을 인용한다.

"우리 한국사회와 같이... 큰 산업이나 대재벌도 없는 나라에서... 정치자금
을 염출하는 것은 난사중의 난사임에 틀림없다... 해방 후 오늘까지 여러번
세칭 의혹사건이 일어났는데... 정치자금과 관련이 깊으며 정치세력이 배후를
이루어 분명한 종결을 못보고 국민의 불신만 가중시켜 왔다"

30여년전에 쓴 고흥문씨 글 내용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성행하고 있으니
정치자금 양성화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백년하청, 누구를 탓할 것인가...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