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육이 가득가득 들어차는 날/빈 수레로 길을 떠나는 바람아/네가 거두어
갈 것은/일대의 소슬한 바람소리일 뿐/네 몸 안에 담긴 허무일 뿐/주렁주렁
매달리는 남루와/가난을 씹는 고소한 맛/눈물의 환희를/어떻게 다 싣고
가겠는가"("가을날 길을 떠나며. 3''부분)

원로 시인 정대구(63)씨가 10년만에 새 시집 "뿌리의 노래"(다층)를 펴냈다.

이번 시집이 나오기까지 시인은 말 못할 고통을 겪었다.

그는 96년 가을 교통사고로 온 몸의 뼈가 일곱군데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듬해에는 심장수술과 망막수술까지 받았다.

우환이 한꺼번에 닥친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시집 네권 분량의 시를 썼다.

"내 몸이 다치고 지쳐서 풀이 죽을 때/나는 힘 센 비바람에도 빳빳이/다시
일어서고 일어나는/가늘고 긴 벼잎을 떠올리며/그렇게 살아갈 정신을 차린다/
/아직도 내가 작은 바람에도/가볍게 휘둘려 여기저기/이 잘난 얼굴 내밀어
설쳐댈 때가/있는가 주제파악도 못하고 그럴 땐/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벼이삭
을 생각하며/나는 부끄럽다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벼잎과 벼이삭" 전문)

몸이 고달플수록 정신은 맑아진다고 했던가.

그의 시는 잘 익은 곡식처럼 알차다.

지친 "몸의 들판"에서 진지한 성찰의 "벼이삭"이 여물어가는 소리.

현실의 아픔을 딛고 세상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관조와 달관의 세계가
느껴진다.

그가 "가볍게 흔들리는 묵향 흰 구름" 너머로 "복잡한 생각들일랑/한 두
획쯤 떨구어 내고/성긴 이 가을날 아침/향기 짙은 예서를 쓰고 싶다"고 노래
할 때 하늘과 땅은 화선지 위에서 공존하고 세상의 빛과 그림자도 일체가
된다.

존재의 근원을 좇는 그의 눈은 떨어지는 폭포에서 "정신의 맨 밑바닥 별"을
발견한다.

그래서 "흰 몽둥이로 내리치는 물벼락" 저 쪽에서 "골짜기에 환하게 불이
켜진다"는 표현도 가능한 것이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가을비"는 자연과 인간의 거리가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지를 절묘하게 보여주는 시다.

"가을 비 가는 비/가다가 다시 굵게 오는 비/굵은 비 가는 비/섞어 뿌리는
하루 종일//지구표 은반 "비창"에 젖어/쉽게 못 떠나는 그대/가는 비 가을
비"("가을비''전문) 정씨는 경기도 화성 태생으로 7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그동안 "나의 친구 우철동씨" 등 열권의 시집을 냈다.

요즘엔 명지대 성결대 삼육대에서 강의하며 시작에 몰두하고 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