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재벌개조작업"을 지켜보면서 수년전에 싱가포르의 국가경쟁력
취재를 갔을 때 현지 경제발전청(EDB)고위관료가 들려준 얘기가 떠올랐다.

"한국은 싱가포르의 물류 금융 외국인투자유치에 관한 "노하우"를 부러워
하지만 싱가포르 입장에선 한국의 현대 삼성같은 거대 그룹기업을 키워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는 싱가포르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들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정립한 한국
재벌관을 들려줬다.

"한국 그룹계열사의 독자적인 경쟁력은 아직 선진국에 못미친다. 이를테면
현대건설은 혼자 힘으론 미국 벡텔을 못당한다. 하지만 그룹계열사간 공동
보조를 통해 핸디캡을 극복해낸다"

그의 한국 재벌평가는 구체적인 사례로 이어졌다.

"현대건설에 공사를 주면 안심인 것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일사불란하게
해내기 때문이다. 현대엔지니어링이 공사설계를 하고 인천제철에서 생산한
철자재를 현대중공업이 만든 배에 싣고 현대건설이 만든 싱가포르 항구에
부린다. 그러면 현대자동차의 트럭이 공사장까지 운반한다. 이는 벡텔도
흉내낼 수 없다. 그래서 현대와 같은 한국기업들이 선진국 업체들을 제치고
공사를 따 낼 수 있다"

지난 96년 가을 영국 버밍엄대학의 한국산업발전 세미나에서 바바라 스미스
교수가 제기한 "기러기떼론"도 같은 맥락이었다.

"기러기들은 떼를 지어 난다. 그렇게 편대비행을 해야 집단 양력(뜨는 힘)이
생겨 멀리 오래 날 수 있다. 무리지어 날 경우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들이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 하는 "세과시 효과"도 있다. 한국재벌은 마치 기러기
떼처럼 계열사간 시너지를 십분 발휘해서 선진국 경쟁자들에 필적해왔다"

외환위기전엔 이런 평가를 받던 재벌들이 요즈음 나라안팎에서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고 있다.

물론 재벌의 과오도 한둘이 아니다.

오너(그룹회장)의 전횡, 투명성문제, 과당경쟁, 내부관료주의, 변칙적인
부의 세습등이 그렇다.

이제 현 정권의 개혁가들은 이런 폐단을 대청소하고 "선단식 경영체질"까지
완전히 뜯어고치겠다고 한다.

이들은 계열사간 고리를 끊어놓는 것이 경쟁력을 높이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기러기들이 편대비행을 못하도록 흩어버리면 독수리처럼 날 수 있을까.

재벌의 병폐를 척결하는 것은 좋지만 단숨에 독특한 체질까지 무리하게 바꿀
경우 "교각살우"의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 이동우 경제부 기자 leed@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