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종현 SK회장이 타계한지 26일로 1주기를 맞았다.

지난 1년동안 재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재계의 거인이었던 최 회장의 공백이 너무 컸다는게 재계인사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그만큼 최 회장이 일찍 세상을 떠난데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고 최 회장과 절친하게 지냈던 조동성 서울대 교수가 최 회장과의 인연,
그의 가르침, 인간적인 면모, 경영철학 등을 그리며 추모의 글을 보내 왔다.

이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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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 최종현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77년 가을이었다.

당시 저자는 미국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컨설턴트로서 걸프오일회사의
국제전략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었고, 현안으로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석유화학공장의 입지를 재조정하고 신규투자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 프로젝트의 내용 중에는 합작투자 형태로 신규 석유화학 공장을 한국에
세우는 방안이 있었다.

투자 파트너 후보중에는 선경그룹을 비롯한 여러 재벌그룹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최종현 회장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 회장은 다른 그룹 회장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점을 보였다.

최 회장은 내가 제시한 걸프오일과의 석유화학공장 합작투자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걸프오일이 한국의 대한석유공사 경영에서 언제 손을 떼려고
하는가를 물어보고는, 전혀 그만둘 계획이 없는 듯 하다는 답변에도 불구
하고 "걸프오일은 언젠가 한국을 떠나게 될 테니 두고 보라"면서, "선경은
이미 걸프오일의 대한석유공사 지분을 인수하는 것을 포함해서 석유사업에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조박사도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미국의 대기업 현장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하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걸프는 제2차 석유위기가 나타난 1년 후인 1980년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던 해외사업으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에서도
대한석유공사의 지분을 매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결과 걸프의 지분은 이미 1972년부터 사우디 아라비아의 야마니 석유상
과 맺은 인간적인 친분을 기반으로 하여 1979년의 제2차 석유위기때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하루 5만배럴의 석유를 가져온 선경그룹이 인수했다.

이로써 선경그룹은 그 후 한국재계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되는 기초를
확립한 것이다.

그리고 최 회장이 장담했던 내용 역시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내가 20여년 전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최종현 회장을 찾아뵈었을 때 최
회장으로부터 받은 충고말씀은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최 회장은 나에게 "앞으로는 연구활동을 열심히 하고, 그 내용을 기업경영자
와 정부관리 등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알리도록 하라"고 제안하면서, 학자
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력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는 필력이 생길 때까지는 일기이건 번역문이건 무슨 내용이라도
좋으니 매일 최소한 200자 원고지 50매씩을 채우라고 말씀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문장에 대해 자신이 없던 나는 그 날부터 원고지 메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원고지 50장를 채우는 작업을 10년쯤 계속하고
나니 그 후부터는 원고지가 무섭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필력은 학술논문이나 교과서, 경영학 관련 서적, 그리고
신문을 통해 내가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바를 쉽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최 회장이 나에게 남겨준 또 하나의 가르침은 인간에 대한 구도자적
자세이다.

내가 처음으로 출간한 책은 국제자원론이라는 전문서였는데, 그 내용은
석유산업이 1, 2차 석유위기를 거치면서 세계경제에 끼친 영향과 향후
전망을 담고 있었다.

나는 최 회장께 책을 증정하면서, 다소 엄숙한 어조로 "저는 앞으로도
계속 석유를 비롯한 국제자원을 연구하려고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처음에는 국제자원론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하던 최 회장은 내
말씀을 듣고서는 손을 젓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조교수, 석유를 연구하려면 미국에 가서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석유보다 더 중요한 자원이 있어요. 조 교수가 앞으로 한국에서 경영학자로서
역할을 하려면 그것을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해 주었다.

궁금증이 생긴 나는 최 회장에게 "그 자원이 무엇인가요?"하고 질문하였다.

최 회장은 "인간자원이지요. 인간은 석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중요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자원입니다"하고 답변하였다.

그리고는 "석유는 한번 쓰면 없어지지만, 인간은 사용하면 할수록 능력이
향상되고 가치가 커지잖아요? 경영도 인간을 어떻게 활용해서 그 가치를
극대화하는가에 초점이 있는 겁니다. 경영학이야말로 바로 인간에 대한
연구가 아닙니까?"라고 말을 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최 회장의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한국사회에서 20년 이상을 지낸 오늘에 와서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국제자원은 인간자원이라는
것을, 그리고 한국에서 연구해야 하는 국제자원론은 인간론이라는 것을...

나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최 회장을 알게 되었고 미래를 설계하는 경영자
로서, 그리고 큰 그릇을 가진 인물로서 최 회장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 분의 발자취를 되새겨 보면서, 남아 있는 우리들이 더욱 정진하여 모든
노력을 한국기업의 발전에, 그리고 한국경영학의 정립에 바치겠다는 약속을
최 회장의 1주기 영전에 바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6일자 ).